“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이문세의 옛사랑 중)

아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다.
아내의 피아노 소리는 위로가 되고 온기가 된다.
아내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부부가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림이 참 좋다. 지난달에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오월창작가요제 ‘은상’ 시상 후 부럽다, 축하한다는 등의 시샘어린 칭찬과 격려를 가장 많이 받았을 것 같은 중창단 〈파파스>의 단무장 박종태 씨를 만났다. 노래하는 이들은 베짱이처럼 즐거운 일만 있을 것 같지만 사람 모양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가슴에 사무치는 지난 일들을 들어보았다.

▶ 신나는 노래도 많은데, 왜?

신성포가 고향이다. 현대하이스코, 지금은 현대제철 공장이 들어선 그곳은 예전에 반농 반어촌의 빈곤한 마을이었다. 1964년에 태어났으니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매고 다녔다. 요즘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의 이야기쯤으로 상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60년대는 그렇게 빈곤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부모님의 물일이나 농사일을 도왔는데, 소년 박종태는 혼자 사색하거나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신들보다 더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의 바람으로 일찌감치 순천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형편을 생각하면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 크셨던 것 같다. 그 마을에서 대학에 진학한 이가 겨우 셋이라니 어려운 시절이긴 했나보다. 어려운 시절이긴 했지만 해 뜨고 지는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있던 집은 그의 감성을 키워 주었다. 8분음표, 4분음표는 몰라도 아름다운 선율에 심장이 뛸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준 고마운 고향이다.

▲ 어촌마을 소년이 중학생이 되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시골소년이 상상해보지 못할 문화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영문학을 전공하며 문학과 고전음악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문화적 충격이었다. 가난한 어촌마을의 소년이 꿈꾸어보지 못한 세상으로의 입문이었고, 지적인 호기심과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단비였다. 머릿속에서 의식세계가 만들어지는 시기였다. 청소년기에는 공부만 잘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되면서 건강한 사람의 가치에 대한 고민하게 되었다.

3학년이 되면서 학군단(ROTC)에 지원했다. 1970~80년대는 군인만 되면 먹고 살 걱정이 없고 성공한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을 살아오신 부모님의 바람으로 군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작은 어촌마을의 소년이 장교가 되었으니 비상을 한 것이다. 단 군인이 되면서 다짐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경직된 군대 문화에 빠져들지 않기, 문학을 통해 찾은 의식세계를 버리지 않기,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기 등 자신이 만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육군에서 공수 특전단으로 지원해 근무를 했는데, 군대는 그의 철학을 고집하기에 힘든 곳이었다. 결국 1993년에 전역했다. 그리고 그 해에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 공수특전단 장교 시절
청주에서 교직에 있던 아내는 참 고운 사람이었다. 결혼 후 순천에서 신혼생활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이제 가장이 되었으니 잘사는 것이 목표였고, 물질적 풍요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귀금속사업을 했는데 시작이 좋았다. 장사도 잘되고 행복했다. 어부의 아들이 한때는 장교도 되었다가 이제는 사장이 되었으니 두 번째 비상의 시기였다.

하지만 비상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IMF를 만났다. 자고나면 생필품 가격이 오르는데, 누가 금붙이를 사겠는가? 게다가 금모으기로 나랏빚을 갚자며 아이 돌 반지까지 꺼내 팔던 시기였다. 사업은 휘청거렸고 결국 다른 일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업을 해보다가 제조업을 시작했다. 제조업에서 다시 무역업으로 전환해 베트남, 일본까지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사랑하는 아내를 더 편하고 잘 살게 해주고 싶었고, 그것이 책임 있는 가장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외 출장과 바쁜 일상으로 아내는 거의 매일 혼자 있었다. 약 7년 동안 그렇게 아내를 슬프게 했던 것 같다. 누군가 말 하더라. 사람은 젊어서는 돈을 위해 건강을 망치고, 나이 들면 건강을 위해 벌어둔 돈을 다 쓴다고. 아내를 위해 아내를 방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모른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 참 여리고 고운 아내였다. 지금도 나에게 아내는 이 시절 그대로다
일 욕심을 내다보니 미국시장에 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법무상의 정보 부족과 준비 부족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국제소송까지 겪으면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시 원점이었다. 정말로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치고 후회가 화가 되어 남들 모르게 참 많이 울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가장 절망적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을 돌아보니 빈손이 아니었다. 그 옆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 8년 만에 귀한 딸 하현이가 태어났다. 하현이를 키우면서 대학시절 형성되었던 의식세계가 돌아온 듯하다.

▶ 부부가 노래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때 공부가 유일한 돌파구라고 여기며 지독하게 공부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졸업 후의 세상은 예상치 못한 벽을 세우고 있었다. 세상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다. 가치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고 변한다. 아이가 남을 누르고 경쟁사회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울림 속에서 행복한 권리를 누리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부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우리 부부가 보여주는 사랑을 느낄 때 아이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 방법으로 아이학교 축제 때 부모로서 참여를 했는데, 그것이 지금 노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 다시 사업을 시작 하실 생각은 없나요?

포기라기보다는 방법이 달라졌다. 이제는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니다 어쩌면 더 큰 것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나니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편해졌다. 여전히 나는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소중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있고, 아내는 내 땀의 가치를 인정 해 준다. 그리고 이제는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라는 공동 작업이 생겼다. 지나온 일들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내가 흘린 땀방울이 우리가족에게는 사랑이 되고 노래가 된다. 또한 두려움으로 외치지 못했던 말들을 노래를 통해 표현 할 수 있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지금이 그 어느 때 보다 좋다.

▲ 이제 연륜이 가득하다고 해야 하나? 지나온 내 모습보다 지금의 내가 좋다.
사람 나이 50을 지나면 굴곡진 이야기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옆에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반복한다. 사람은 가끔씩 지겨워질 때도 있다고 하지만 이 부부는 그럴 틈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부는 가장 소중한 그것을 찾았으니 지금이 세 번째 ‘비상’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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