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과 평화의 밀밭 걷기’를 다녀와서

간밤에 과음한 속을 달래느라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순천에서 보성에 있는 백남기 농민의 자택까지는 서둘러 차를 몰아도 1시간 정도 걸린다. 행사 시작 시각이 오전 11시 30분인데, 집에서 11시 넘어서야 겨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숙취가 남아 흐리멍덩한 머리로 낯선 길을 더듬어 겨우 남해고속도로에 오르니, 성큼 다가온 여름을 실감하게 하는 가벼운 더위와 눈부신 햇살, 5월의 짙은 신록에 다시 취할 것 같다.

어디를 돌아봐도 찬란한 녹음이다. 과연 계절의 여왕이군. 들판엔 막 모내기를 마친 논도 있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민의 일손도 분주하다. 도로변의 호젓한 풍광에 들떠 잠시 드라이브 즐기러 나온 기분이 되었다가, 오늘 길을 나선 이유를 떠올리니 다시 무거운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다. 백남기 농민과 그 가족들, 고통받고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 하길 기도한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보성군농민회가 행사장을 안내하기 위해 붙여놓은 플래카드가 보인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갈림길마다 플래카드를 붙여놓아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시각은 오후 12시 30분. 늦은 도착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여러 곳의 시민․사회단체가 만든 플래카드들이 길 따라 백남기 농민의 자택까지 주욱 걸려 있다. 플래카드에 적혀있는 문구가 모두 다르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그리움과 쾌유 기원, 사태의 책임자들에 대한 분노, 나라 돌아가는 꼴에 대한 개탄이 가득하다. 한적한 농촌 마을이 오늘은 먼 길을 달려온 차와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소담한 마당에 들어서니 점심 식사가 한창이다. 다행이다. 그래도 밥은 얻어먹을 수 있겠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반갑게 맞아준다.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들, 식탁 치우고 다시 차리는 봉사자들의 바지런한 손길, 서울서 느지막이 도착해 서둘러 자리 잡는 사람들… 작고 낡은 농가 주택이 오늘은 시끌벅적 시장통이다. 모인 사람이 백 명은 넘어 보인다. 거창한 카메라를 둘러맨 취재진도 여러명이 눈에 띈다. 평소에 사진찍기에 별다른 취미가 없지만, 오늘은 나도 취재진이라도 된 마냥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잔치국수 한 그릇 받아들고 국물을 들이켜니 속이 좀 풀린다. 집에서 키웠다는 멧돼지 수육이 이채롭다. 비계가 두꺼운데 흐물거리지 않고 쫄깃하고, 고기 맛도 더 진한 것 같다. 소박하지만 푸짐한 상차림에서 오늘 행사를 준비한 여러 사람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자 드디어 밀밭 걷기가 시작된다. 풍물패를 앞세우고 줄지어 오솔길을 올라간다. 장구를 잡은 앳된 소녀의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자택에서 조금 위쪽 산어귀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너른 밀밭이 펼쳐져 있다. 며칠 전에도 한 번 방문했었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정말 말문이 막히게 만든다. 반 년 전, 백남기 님이 시위에 나가 물대포 맞고 쓰러지기 직전에 이 밭에 우리밀 씨앗을 뿌리고 올라가셨다 한다. 밀은 어느새 쑥쑥 자라 수확을 앞두고 있건만, 밭주인은 병상에 누워 의식이 없다. 관리하는 손길이 부재한 탓에 잡초가 많이 섞여 있지만, 그래도 눈부시게 푸르른 밀밭은 아름다워서 더 처연하다.

 
 
 
 
밀밭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해송아래 자리한 작은 전망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본행사를 시작했다. 참가 단체와 명사들 소개에 뒤이어 발언이 이어진다. 백남기 농민과 평생 동고동락한 농민운동가에게서 백 농민이 살아온 생애를 전해 들었다. 농민 출신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는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백남기 농민의 둘째 딸 ‘울보’ 백민주화 씨는 발언 시작부터 울먹거린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애끓는 가족들의 심정을 함께 아파하며 눈시울 훔치는 사람이 여럿이다. 백남기 님 막걸리 친구였다는 송만철 시인이 그리움 가득 담아 지은 시를 낭송한다.

발언을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으로 본행사를 마무리했다. 다시 풍물패를 앞세우고 밀밭 가운데를 걸어 내려간다. 밀밭 가운데 선 소나무들 사이에도 그리움과 기원을 담은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다. 그 사이 사이에 참가자들이 직접 기원을 적어 넣은 노란 리본을 묶는다.

 
그 다음엔 보성역으로 자리를 옮겨 문화제를 시작했다. 지역 국회의원 당선자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인사하러 들렀는데, 진정성 없이 눈도장만 찍고 가려는 것 같아 씁쓸하다. 여러 공연 사이사이 연사들의 발언도 있었는데, 다 기억할 수 없다.

문화제는 타악그룹 ‘하늘땅’의 신명나는 공연으로 시작했다. 나도 흥이 나 머리를 끄덕거린다. 슬픔과 신명이 한데 어우러질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 소리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그룹 리더인 상쇠는 과거 백 농민과 단식투쟁을 같이 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두물머리에서 왔다는 어수룩한 인상의 두 청년 뮤지션 ‘로맨스 조’와 ‘다크 박’. 통기타 한 대와 전기 기타 한 대의 단촐한 구성으로 생수같이 맑은 노래를 부른다. 백 농민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노래 ‘밥과 당신’을 들으며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졌다.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는데, 감수성을 되찾는 중인가? 격하지도 않은 담백한 노래 가사에 눈물이 터진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앞서 밀밭에서도 마이크를 잡았던 백민주화 님과 송만철 시인도 역시 나와 발언했다.

백민주화 님은 역시 울지 않으려 애쓰지만 발언 내내 울먹였다. 용케 큰 울음은 터트리지 않고 발언을 마쳤는데, 이어진 공연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함께 부르며 옆 사람들과 손을 맞잡자 결국 참았던 눈물 쏟으며 오열하고 만다.

 
 
 
송만철 시인의 낭독은 다시 들어도 절절하게 사무친다.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어서 오세요, 밀밭으로!” 오늘도 막걸리를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문화제를 마치고 함께 참가한 사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이동해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회의와 식사를 했다.

긴 하루였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복잡한 상념과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밤 늦은 시간에 홀로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면서 백남기 님의 삶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의 행사는 쓰러진지 어느새 반년이 흐른 백 농민을 잊지 않고 앞으로의 싸움을 이어가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한 자리였다. 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순천녹색당 김수현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