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5 - 오태례(67세)

조곡동 중앙경로당 살림꾼이자 수십 년 동안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오태례 씨(67세)는 조곡동 부녀회장이다. 경로당을 드나드는 어르신들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한지라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서 하신다. 부녀회장이니만큼 여기저기 다닐 일도 많아 힘들 텐데 공기 좋은 동네에 살아서 그런지 여전히 활기차다.

1947년 율촌면 신풍리에서 3남 4녀 중 첫째로 태어난 오태례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오태례 씨는 스물한 살 때 결혼하고 순천으로 오면서 정든 고향 신풍을 떠나게 된다.
 

▲ 조곡동 부녀회 오태례(67세) 회장
우리 아저씨 첨 봤을 때 인상 좋고 이뻤지
오태례씨와 남편 정종필(78세)씨를 이어준 사람은 당시 순천철도기관차사무소에 근무했던 아버지였다.

“결혼은 스물한 살 때, 1968년도에 했는디, 우리 아버지 직장이 철도였어. 우리 아저씨랑 같이 근무를 했어. 우리 아저씨는 기관차 운전을 했고 우리 아버지는 저기 육교 건너가면 급수탑이 있어. 거기서 근무를 했어. 소속은 같은 기관차사무소고, 우리 아저씨가 한참 후배지.”

직장 동료인 아버지의 중매로 남편 정종필 씨가 오태례 씨의 집으로 선을 보러 왔다.

“우리집으로 선보러 왔는데 첨 봤을 때 인상 좋고, 이쁘고 좋았어. 11년 차이가 나는데 오히려 우리 아저씨가 더 젊어 보였어. 선보고 그해 결혼했지. 옛날에는 연애, 데이트 이런 게 있나. 우리 아버지도 맘에 들었나봐. 그집도 우리집을 잘 봤는가봐. 그래 그렇게 됐지.”

결혼하고 나서 순천 역전 근처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조곡동에서만 서너 번 이사 다니면서 살다가 1974년 철도관사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그 후로 이곳에서 40년을 살고 있다.
 

기관사 마누라들은 둘이 같이 버는 거랑 똑같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업이 아닌 기관사의 아내로 살면서 겪은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가 젊었을 때 기관사 마누라들은 남자들하고 같이 버는 거랑 똑같다고 그랬네. 우리가 잠을 못자. 밤 12시에도 나가고 새벽에도 나가고. 새벽에 나가면 따뜻하게 잡숫게 준비하고 들어오면 마실 거라도 드려야 하고. 그때 당시에는 우리도 잠을 못자. 나가는 사람도 고생이지만 우리도 고생 많이 했구마. 출퇴근 시간이 워낙 들쭉날쭉 하니 식사도 제대로 하나? 진주나 마산같은 경상도로 가면 음식이 안 맞으니까 도시락을 두 개씩 싸줘야 돼. 먹는 사람도 고생스럽고 해준 사람도 고통이여. 도시락 반찬도 대충 못하니까 몇 가지씩 해야 돼. 그때는 젊으니까 애기 업고 달려서 시장가고 찬거리 사와서 하고 그랬지.”

결혼한 지 46년이 된 오태례 씨는 그때 당시 우리 엄마들이 다 그랬을 거라며 별 거 아니라고 한다. 서민들의 발인 열차를 움직이는 기관사들, 그 기관사들 옆에 오 씨와 같은 아내가 있었기에 한국철도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 다닝깨 재밌드마. 준비 과정은 복잡해도 하고 나면 맘이 편하고
오태례 씨는 17년 동안 조곡동 부녀회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럿이 모여서 봉사활동 다니고 하는 일이 재밌었다고 한다. 철도운동장에 있는 복지식당 자원봉사는 초창기부터 한 달에 네 번씩 꾸준히 해오다가 지금은 다른 팀들이 많이 와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간다고 한다. 작년부터 부녀회장을 맡아서 일하고 있다.

“17년 동안 부녀회 활동 하다보니까 혼자 하면 못하지만 같이 봉사 다닝깨 재밌드마. 부녀회가 돈이 없어서 풀도 매고, 미역 판매도 하고, 연말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어르신들 돕기도 하고 그래. 준비과정은 복잡해도 하고 나면 맘이 편하고 그래.”

여러 가지 부녀회 일중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불우한 아이들 ‘1일 부모 되어주기’ 행사라고 한다.

“불우한 애들 있어. 할머니가 키운다든가, 그런 애들 불러서 십시일반 보태주고 애들 티셔츠도 사 입히고. 우리가 ‘1일 부모 돼주기’ 해서 박람회장도 데리고 가고, 서울 과천 대공원, 광주에 있는 대공원 이런 데 안 다닌 데 없이 애들 데리고 많이 갔어. 우리는 그 행사가 큰 행사여.”
 

어휴 저 아주머니들은 잠도 안자고 산에 갔네.
관사마을에 살면서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일단은 장대공원, 죽도봉이 가까워서 좋고, 공기도 좋고, 지금은 안 다니지만 등산을 좋아해서 봉화산을 많이 다녔어. 젊을 때는 새벽에 친구들 몇 명이 전화 신호만 넣어. 글믄 새벽 5시에 나와. 거미줄도 걸리고. 근디 봉화산에 올라갔다가 뛰어내려오면 그때 올라가는 남자 분들이 ‘어휴, 저 아주머니들은 잠도 안자고 산에 왔네.’ 그래. 우린 얼른 산에 갔다 와서 밥해서 애들 먹이고 학교 보내야잖아. 부지런했지. 애들 키울 때가 좋은 거여.”
 

우리는 관사마을의 중요성에 대해 못 느끼고 살지
경북 영주에도 철도관사마을이 있었다. 관사 대부분이 거의 다 사라지고 쓰러져가는 관사 두 채가 있었는데 이를 영주시가 매입해서 일제시대 관사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놓았다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영주 철도관사를 방문했던 박경창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은 “거기는 겨우 두 채 가지고 그렇게 해놨는데, 대한민국 철도관사는 우리 조곡동 관사마을이 진짜배기여. 우리도 하루 속히 시가 관사 몇 채를 매입해서 복원을 시키고 해야 할 텐데….”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선하다.

“지금이야 내부 개조도 많이 하고, 지붕도 형태는 그대로 두면서 유행 따라서 조금 고치고 했지만, 이런 데가 없지. 우리는 관사마을의 중요성에 대해 못 느끼는데, 지금도 가끔씩 일본사람들이 여기를 방문할 때가 있어. ‘일본사람들이 오면 다다미방 볼 수 있는 집이 있냐? 박람회 할 때 민박할 수 있냐?’ 그런 거 물어보고 그랬어. 근디 다 고쳐서 그런 집은 몇 채 없을 거여.”

철도관사마을은 철도 역사뿐만 아니라 순천의 근대화와 순천 도시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중요한 근대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특히 철도관사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주민들 역시 철도관사마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순천시 차원에서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비를 지원받아 내년(2014)부터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무엇보다도 관사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평범한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들이 소중하게 기록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주민들의 생각과 말씀을 존중하면서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로인해 관사마을 주민들과 조곡동 주민들이 자신들과 마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