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승선교와 강선루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 무지개 돌다리로써 예전 선암사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이 다리를 건넜는데,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승선교를 지나면 나타나는 강선루는 팔작지붕으로 아래는 네 기둥사이를 지나가는 통로이고, 위는(2층) 청마루로 된 중층 문루이다.

이 두 건축물은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가의 빼어난 예술 감각이 조화를 이룬다. (동)부도전을 지나 50m를 돌아가면 30m 거리에 두 개의 석조 쌍무지개 다리를 놓았는데, 사람이 밟는 위쪽은 흙으로 덮어 첫 번째 다리를 건너갔다가, 두 번째 다리에서 다시 되돌아 건너와 강선루를 통해 선암사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 승선교

첫 번째 다리는 규모가 작고, 규모가 큰 두 번째 다리가 보물 400호인 승선교이다. 승선교 준공 표석을 보면 승선교는 1707년(숙종3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6년 뒤인 1713년(숙종39년) 완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승선교를 보호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선암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퉁이 언덕을 깎아 도로를 만들었다. 지금은 사람과 차가 승선교를 지나지 않기 때문에 승선교의 건축 의미를 놓치기 쉽다. 다리가 놓인 형태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종교나 예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승선교는 1713년에 완공되었는데, 강선루는 그보다 213년 뒤인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창건되었다.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주지인 월영선사의 선견이 내린 힘든 결단과 각고의 노력으로 현재의 걸작이 탄생될 수 있었다.

▲ 강선루

일반적으로 절의 문루는 일주문 안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선암사에서 일주문 밖에 문루를 하나 더 세운 것은 강선루가 승선교와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이룬 것이 그의 해답이다. 강선루 아래에는 ‘선원교’라는 아주 작은 다리가 하나 있다. 오른쪽 표석에 다리의 이름인 ‘선원교(仙源橋)’를, 왼쪽에는 다리가 놓인 때를 한자로 새겨 놓았다.

▲ 강선루 아래 선원교

가까이 가서 보면 ‘× × 十四年 六月 日 竣功’ 이라는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제일 위쪽의 연호가 보이지 않는다. ‘소화’(昭和)라는 당시의 일본 연호를 광복 직후 선암사의 누군가가 지워 놓은 것이다. 이 다리가 준공된 소화 14년은 1939년으로 일제강점기이다.

이곳은 선암사 위에서 냉골을 따라 흘러내린 개울물이 남쪽의 큰 골짜기인 큰굴맥이 골을 중심으로 은적암골, 비로암골, 물골, 대승암골 등 선암사 왼쪽의 굵직한 골짜기들의 물을 모두모아 절의 입구인 이곳에서 ‘선암천’의 본류와 합쳐 선암사를 감싸는 Y자 형태가 되어 강선루라는 걸물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강선루는 1929년에 만들어져 선암사의 명물이 되었고, 선원교는 그보다 10년 후인 1939년 통나무를 건너 만든 흙다리를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다리로 다시 놓았다. 많은 사람이 강선루와 선원교가 같은 시기에 건축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선원교의 표석을 보면 10년의 차이가 난다. 한때 ‘29’와 ‘39’를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는데, 다리 밖으로 세운 기둥받침인 네 개의 대형석주와 다리의 구조를 비교해 보고나면 동시에 건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