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훈
예술공간 돈키호테
기획연구팀장
따스한 봄날, 고흥 남포미술관을 찾아갔다. 김창완의 옛 노래 <청춘>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나지막하게 따라 흥얼거린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청춘을 노래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청승맞다고. 청춘의 세월을 체념하며 구슬프게 넘기고 또 넘어가는 이 노래는 1981년 발표되었다. 한참을 저 멀리 흘러간, 흘려보냈을 노래이다. 아마 80년대에 이 노래를 애창했을 청춘들도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2015년 겨울, TV드라마 <응답하라1988>을 통해 이 노래는 다시 주목을 받았다. 어떻게 청승맞은 이 노래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까? 이 노래가 청년문제와 중첩되면서 복잡한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청년문제’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것은 지금의 청년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이 아니라 기성사회 또는 그 사회에 안주해 있는, 자기 이익에만 급급했던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덮어 둔 장기미제사건과 같은 것이다. 그 문제가 유독 일자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청년층에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청년문제란 청년이 처한 위기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연결된 문제이며, 모두의 위기라는 점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라는 노랫말처럼 생물학적으로 청춘은 언젠가는 지나갈 시절이다. 그러나 위기라는 것은 반복되거나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사회학적인 청춘은 마냥 견디며 흘려보낼 것이 아니다. 정밀하게 원인을 찾아내고 꼼꼼하게 분석을 해서 보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가능한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 청년층이 기성사회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진입자체가 어렵다. 청년의 사회 진입이 늦어질수록 부모로부터 독립, 자립해야 할 시점은 점점 늦어지고 결혼이나 출산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다. 지금의 청년세대가 이전의 세대와 비교해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을 취업준비에 쏟아 붓고 있다. 교육현장은 우정이 아닌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 과연 우정을 쌓을 시간은 있는 것인가? 무엇이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국가가 의무교육을 하는 이유는 크게 국가의 경영을 맡길 인재와 인력을 꾸준히 양성함으로써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가는 의무교육을 비롯한 대학 이상의 교육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에 대한 국민의 부담을 줄여가는 것이 맞다. 또한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 각자가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간접자본과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국민의 조세부담을 높이면서 복지해택을 낮추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경영이고 통치인가? 일자리를 제공하기 어렵다면 공교육의 질이라도 높이는 것이 맞다.

미생의 청춘은 완생을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생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하고, 위기에 직면해서는 묘수를 찾아야 하고 상대의 수를 잘 읽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을 배우고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알파고처럼 무조건 이기는 방법만 터득하는 것도 문제이다.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바둑의 미학, 또는 바둑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듯, 산다는 가치와 그 살림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 중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기는 경쟁만을 부추기고 가르치는 사회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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