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올 6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송광사에는 수많은 고승들의 부도가 있다.

송광사 부도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부도를 관리하는 전각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인 ‘보조국사비(높이 394cm, 본 탑 253cm×100cm) 등 다섯 기의 비와 선사들의 흔적인 29기의 부도가 남아 있으며, 구산탑전(구산대종사 사리탑) 바로 뒤편 언덕에도 9기의 부도가 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송광사가 배출한 국사들의 탑은 각기 다른 곳에 모셔져 있다.

그중 제1세 보조국사의 감로탑만 절의 울타리 안에 있고, 나머지 여섯 국사와 한 대사의 탑은 송광사에 딸린 암자나 옛 암자 터 주변 언덕이나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감로탑을 제외한 7기의 탑은 높이가 약 240cm 안팎으로 2~3단 사각 받침돌을 제외한 높이가 약 180cm 안팎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에 모양이 비슷해서 얼핏 보면 그 탑이 그 탑 같아 보인다. 탑이 작은 것은 당시 불교가 처한 상황이나 송광사의 고립된 지리적 여건, 산세와 터를 연결한 풍수 등으로 영향으로 분석한다.

▲ 보조국사 감로탑
▲ 진각국사 원조지탑
▲ 청진국사 적조지탑

그러나 깊은 눈으로 탑의 규모와 형태를 들여다보면 선사(先師)에 대한 후학들의 높은 공경심과 겸손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탑을 조성할 때 처음 조성한 탑의 규모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조화와 균형의 미를 극대화 하려는 노력이 수백 년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기를 비슷한 규격으로 조성하는 데서 오는 획일적 단순함을 벗어나기 위해 각 탑마다 특징이 있다.

먼저 몸돌을 비롯한 기본 구조물의 크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섬세한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4각 밑받침돌을 2단과 3단으로 구분하거나 석주의 두께를 달리 하였다. 상하 연잎돌에도 방석을 깔거나 두께를 다르게 했으며, 전체 높이를 낮추기 위해서 지붕 장식돌의 일부를 생략하여 마무리한 탑도 있다. 

장식과 구성 면에서도 밑받침돌의 종횡 배열과 판석의 크기와 수를 달리했으며, 앙화석을 8각과 원형으로 교차하거나 연잎의 크기와 모양을 다르게 새겼다. 지붕돌의 윗면을 민짜와 기왓골로 가르는 등 한 개의 탑을 만들 때마다 가졌을 예술적 고뇌가 배어난다.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만약 7기의 탑이 모두 같은 계획에 따라 조성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기념물(?)은 조성 당시의 평가나 능력, 그리고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규모나 형태를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세우고 싶어 할 듯 하다. 그런데 후학과 후견인 모두가 흔들리지 않고 선사(先師)가 제시한 초심에 따른 절제된 아름다움의 정신적 가치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8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앞에 서면 천근의 무게로 다가오는 진리의 고고성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보조국사 감로탑(普照國師甘露塔)  

▲ 보조국사 감로탑

보조국사 감로탑은 1213년에 조성된 것으로 송광사의 관음전 뒤편 계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전체 높이는 280cm로 고려 후기의 양식에 따랐다.

보조국사 감로탑 해설문을 보면 “송광사 16국사 중 제1세인 보조국사께서 1210년 53세로 열반하자 고려 희종께서 시호를 불일, 탑호를 감로라 내려 강종2년에 세운 탑”으로 설명하고 있다. 탑의 형태는 맨 아래 정사각형의 큰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네 귀퉁이에 각을 이룬 큰 받침돌을 또 하나 끼워 넣은 것이 특징이다.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탑신)을 받치고 있다. 몸돌은 고려 후기 양식인 둥근 공 모양이며, 몸돌 위에 올려놓은 8각 지붕돌은 전각이 급하며 지붕돌 위의 머리 장식은 바퀴돌과 꽃봉오리가 간결한 느낌을 준다.

보조국사는 고려 중기인 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국학의 학정을 지낸 정광옥과 개흥군 출신 어머니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뜻에 따라 명종3년 16세(비문에는 8세) 때 曹溪의 雲孫인 宗暉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1182년(명종 12년), 25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꾸준한 구도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고 불교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였다

당시의 불교는 선종과 교종 정파와 혜파로 나뉘어 끝없는 논쟁과 대립 속에 부패와 타락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선종과 교종, 정파와 혜파를 향하여 선교불이(禪敎不二), 부처의 마음과 조사의 말씀은 둘이 아니요 하나의 길로 통하며 이 길로 가기 위한 수행 방법도 정혜쌍수(定慧雙修), 정과 혜는 한마음 위에 있으므로 함께 닦아 하나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불도의 수업이라는 깨달음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 미혹한 중생도 부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기치 아래 10여 년 동안 송광사(수선사)를 중심으로 승풍 쇄신 운동에 앞장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후학을 이끌어 피폐한 당시 불교를 개혁 재건한 선종의 중흥조이다.

보조국사는 1210년 3월 7일, 53세를 일기로 대중과 선문답을 끝낸 뒤 법상(法床)에 앉은 자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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