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올 6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인월암(印月庵)  

인월암(印月庵)은 송광사의 대웅전 건너편 조계봉에서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의 아래에 있다. 조계암골의 왼쪽 아래이다.

▲ 인월암 입구

큰절(송광사)에서 찾아가려면 천자암(삼밭등)으로 가는 길 입구인 선암사⇔천자암 삼거리(채마밭 입구)에서 약 70m 지점에서 오른쪽 채마밭을 가로질러 산비탈로 접어든 뒤 100m 가량 오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판와암이 있었던 자리에 인월암을 새로 지었다. 채마밭 중간을 가로질러 산비탈 입구까지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자동차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앞을 올려다 보면 높다란 축대와 암자가 있다.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높이 약 3.5m, 길이 20m 가량의 축대와 폭 12m, 넓이 20m 정도의 공간은 옛 판와암이 독거 수련암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 인월암

판와암은 『송광사지』에 등장하는 17암 중의 하나이지만 “1924년 판와암은 이미 그 명칭과 터만 남아 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판와암의 창건이나 폐암에 관한 정확한 연혁은 알 수가 없으며, 1900년 대 이전(1800년 대 말)에 이미 폐문되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암자에 대한 내력은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다.

옛 스님들은 판와암이 송광사의 기와 가마를 관리하는 암자였다고 하였다. 불사가 많았던 큰 절에서는 기와를 대부분 직접 구워 사용하였다. 송광사의 기와 가마가 있었던 곳은 판와암과 가까운 채마밭이 끝나는 곳으로 지금의 축구장 위 언덕과 개천 방향 일대이다.

이곳의 지명이 삼밭등이며, 지금도 숲속에는 와공들의 거주지 흔적인 돌담이 남아 있고 기와 가마들이 있었던 개천 방향 비탈에는 많은 와편이 출토 된다. 

절에서 암자란 스님들이 방해받지 않는 수도처로 짓는 것이 기본이므로 처음부터 수도장 이외의 목적으로 창건되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정성들여 높게 쌓은 축대에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창건 때는 기와 가마의 관리와 관계가 없는 상징성으로 명명된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훗날 가마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암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송광사 기와 가마에 언제 마지막 불을 지폈는지는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920년 경 불사에 필요한 기와를 외부에서 구입해 온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을 미루어 볼 때 1800년 대 후기까지는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85년 광주(금호)고속 박인천 회장의 시주로 (구)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을 새로 짓게 되자 (호주 비구니가) 해체한 명부전 목재로 판와암 터에 인월암을 지었다. 소형 불상을 모실 때 지장전과 함께 점안식을 거행하였다고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스님은 증언했다.

한편 인월암 창방에는 원목을 잘라 다듬어 청색 글씨로 쓴 ‘인월정사’라는 편액 하나가 걸려 있다. 이 명판은 본래 이곳 인월암의 편액이 아니라 구산대종사께서 말년에 조계산의 장박골(장막등 서편)에 기거했던 초당 인월정사에 손수 써 붙였던 명패를 철거할 때 떼어다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 판와암 터인 이곳에서 머슴이 해온 풀 짐 속에 산삼줄기가 가득하므로 욕심 많은 주인이 독차지하려고 머슴을 속이고 몰래왔더니 산삼이 모두 너삼(황기)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너삼방터’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산선사 탑전(적광전)

송광사 일주문에서 출발하면 100m에 이르지 못한 곳에 ‘송광사 사적비’가 있다. 그 곳에서 다송원 옆 개천의 낙하담을 건너 어린이 법당(전 목공소)을 왼쪽으로 돌아 큰절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라 40여 m를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다리(해탈교)가 나오고 전면에 건물이 보인다. 

▲ 구산선문

이곳은 예전부터 오래된 부도가 5~6기 있었던 곳인데, 그 모습이 장독처럼 생겼다하여 사람들이 장독거리라고 부르던 청량각에서 올라와 부도전으로 가던 지름길이 있는 곳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특별하게 지어진 누문에 ‘구산선문’이란 명패가 머리를 들어 올리게 한다. 1983년도 입적하신 구산스님의 탑전으로 조성한 곳이다.

상징적인 뜻을 내포한 특별한 모양의 높다란 문각을 세우고, 그 안에는 두 아름드리 통나무를 세워 중심 바닥으로부터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마치 통천문이 상기되는 통로를 역 ‘U’자 형으로 파내어 만들어 놓았다. 경내로 들어가면 위단에는 널다란 잔디광장을 조성하여 웅장한 모습의 ‘구산 대종사’ 탑과 비가 시선을 멈추게 한다.

아래단에는 적광전과 무상각이 탑을 향해 ‘ㄴ’자 형태로 지켜보고 있다. 적광전에 모셔진 구산스님 생전의 대형 전신 미소상은 마치 예술작품을 전시해 놓은 듯 미소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구산 스님은 송광사 방장 스님으로 계시다가 1983년도에 입적한 우리나라 불교계의 존경받는 큰 스님이었다. 다비식이 끝나고 나서 어떤 신문에서는 160과가 넘는 역대 최다의 사리가 수습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으나 실제 봉안된 사리의 수는 최종 53과 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절 집과 관계없거나 구산스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잘 정돈되고 아늑한 이곳을 찾아 경배하고 삶에 쫓기는 마음의 여유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 탑전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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