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해
사랑어린배움터 교장
우리가 차 다기로 아까 차를 우려먹잖아요. 지가 뭘 하고 있는 지 잘 모를 거야. 그렇죠? 사람도 자기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잘 모른다고. 나는 지금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그걸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궁금해 할 수는 있잖아?

‘지금 누가, 나를 쓰고 있는가? 어디에다 나를 쓰고 있는가?’ 그런 걸, 나는 차 다기가 아니니까,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으니까, 그걸 궁금해 할 수 있어요. ‘지금 누가 나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 그런 걸 물어 볼 수 있다고 봐요.

그걸 진지하게 물어보면, 나무하고 잎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잎 같은 존재이니까 나무가 그 답을 하게 되어 있어요. 감은 잡을 수 있다고요. 선명하게는 모른다 할지라도…

그걸 알게 되면, 그거 신나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차 다기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여기는 예배당이니까 하느님에게, 예수님에게 내가 쓰이고 있는 거라고. 

 나는 아까 여기 들어와서 여기 스님이 앉아 계시고, 여기가 절간이고, 절간에서 우리가 <0000교회>라는 타이틀을 걸고 여기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데에 우리가 쓰임 받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많은 장소를 내버려 두고 하느님은 왜 이 절집에 우리를 불러서 이런 걸 시작하고 계시는가?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하는 감이 들었어요. 아마 지금까지 유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얘(차 다기)가 막 나서서 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그저 그분이 쓰시는 대로 살면서 늘 기도하는 거지. ‘당신이 일을 만들고, 당신이 일을 하시고, 당신이 목적을 이루시니 우리는 당신의 손발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잔치에 우리가 충분히 기꺼이 동참해서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도와 드려야 되니까 당신을 잘 도와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잘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절에서 기독교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건 내가 볼 때 보통 사건이 아닌 것 같아요. 장차 어떤 세계가 어떻게 벌어질까 하는 것을 살짝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우쭐거릴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우리 모두 그분에 의해서 존재한다면 괜히 여기 있는 것은 아닐 거고, 우리가 지금 쓰이고 있다는 생각을 알고, 그것을 물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이 ‘지금 누가 나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를 물으며 살면… 이 장소가 허락하는 한, 예배드리며 살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절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어느 교회이야기를 정리 한 것입니다. 물론 글쓴이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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