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우리 동네는 워낙 산골짜기였다. 쟁기로 논을 갈고, 손으로 모내기 했으며, 산속에 있는 천수답 다랭이가 우리 집 농사의 전부였다.

우리 아버지의 걱정은 모를 심어놓고 추수의 계절 9월이 되면 깊어졌다. 그때는 멧돼지가 농가에 큰 피해를 줬다. 산골짜기 논에 벼가 여물기도 전에 식구대로 소풍을 와서 뒹굴고 가면 그 뒷날부터 아버지는 며칠 동안 땀 흘려가며 벼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런데 이놈의 멧돼지들이 이번엔 이웃 사촌까지 데리고 와서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부터 멧돼지와 사투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첫 번째로 윗 논과 아랫 논의 높이 차를 이용해서 물이 떨어질 때 그곳에 양철판을 깔아놓고, 그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멧돼지를 쫓아냈다. 그런데 그것도 3~4일은 효과가 있지만, 멧돼지들도 일정한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어김없이 찾아와서 벼가 익어가는 논을 뭉개버렸다.

그 시절에는 쌀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에 멧돼지를 쫓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두 번째로 생각해 낸 것은 논에 라디오를 켜 놓는 것이었다. 이 방법이 나를 추수하기까지 계속 괴롭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와 멧돼지의 치열한 두뇌 싸움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멧돼지들은 낮에 사람이 논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오지 않다가 저녁 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논에 라디오를 설치해 놓고 아버지는 컴컴해지면 집에 들어왔다. 어느 날부터, 그 일은 내 일이 되었다. 집에서 소똥을 치우고 집안일을 하다가 컴컴해지면 그때야 집에서 약 4km 떨어진 산골짜기 논에 가서 라디오를 켜고 와야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서움이 무척 많았다. 아버지 명령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산에서 들려오는 온갖 해괴한 소리가 나를 더욱 무섭게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오직 라디오 볼륨을 켜기 위해 마라토너보다 더 힘껏 달려야 했다.

어떨 때는 “논일을 하고 집에 오실 때 라디오를 켜고 오시지 왜 나한테 시키실까?” 원망도 많이 했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일찍 켜놓으면 건전지가 빨리 소모되어 해가 저물어서 라디오를 켠다”고 했다. 나는 가끔 “속임수를 쓸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가 라디오를 켜고 오라고 하면 가는 척 하고 한쪽에 숨어 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집에 오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새벽에 아버지가 매일 라디오를 끄러 가셨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때 논에 라디오를 켜 놓는 것이 큰 효과를 봤는지 멧돼지들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올해 83세가 되셨다.
“지금도 흙과 사시는 당신 멋져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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