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14>
원폭이 투하될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각각 42만 명과 27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피폭시의 외상이나 급성 방사선 장애로 즉사 혹은 그해 말까지 사망한 사람은 히로시마 약 16만 명, 나가사키 약 7만 4000명이었다. 이들 원폭 피폭자 중에는 적지 않은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조선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체 피폭자의 약 10%가 조선인이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원폭 피폭자는 전쟁의 피해자이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구성원으로서 강제 징용이나 생계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한국인 원폭 피폭자는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자 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원폭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공 친미국가에서 미국의 전쟁 책임을 묻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65년 한일회담 때도 원폭 피폭자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원폭 투하는 ‘신의 섭리’라는 논리를 제공하면서 ‘고귀한 희생’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즉, “만일 원폭 투하를 통한 종전이 없었더라면,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더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며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원폭 투하는 피폭자의 ‘고귀한 희생’과 맞바꾸면서 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한 것이다(『국가와 희생』).
한편, 원폭 피폭자는 다른 전쟁 희생자와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의 유전’이다. 해방 후 원폭 피폭자는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환경과 함께 ‘원폭병’이라는 질병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원폭병은 원폭2세 환우라는 다른 전쟁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이들 원폭2세 환우는 전쟁을 경험하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자신의 신체에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전쟁이 만든 전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트라우마의 유전으로 한평생 원폭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삶을 삶답게 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가난과 질병 그리고 사회적 소외를 받아야만 했다. 1991년에 작성된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에 의하면, 원폭 피폭자의 자녀수는 2369명이었다고 한다.
망각된 기억을 복원하는 이유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 눈을 감지 않기 위해서다. 남한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원폭 피폭자 문제를 사회적 기억으로 복원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기억의 평화학’이 요청된다.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가운데 2종은 한국인 원폭 피폭자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교출판사의 「新訂版 高校日本史A」 제2장에는 평화기념공원에 위치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사진과 함께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당의 「改訂版 日本史A」는 실교출판사에 비해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교출판사는 단순히 위령비가 있다고 쓰고 있는데 반해 삼성당은 1945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조선, 중국, 대만 등의 사람들이 강제 연행 또는 포로로 살고 있는 와중에 피폭을 당한 것, 히로시마에는 약 5만 명, 나가사키에는 약 2만 명의 조선인 피폭자가 발생했다는 것,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1967년에 결성된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 손진두 사건 등 짧지만 대체적인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도 생소한 원폭 피폭자 문제가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