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나는 한국의 좌절된 땅, 전라도에 산다. 전라도에서도 동쪽의 변방, 순천에 산다. 여수와는 또 다르게 정치적으로 더 소외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구석이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순천이 아니다. 순천에는 굴러들어온 돌이 많다. 얼마나 많은지는 잘 모르지만, 고흥, 광양, 벌교, 구례, 여수까지 치면 정말 많다. 여러 고장의 사람들이 많으니 여러 견해가 들린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자유롭다.
 
자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먼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자유는 지향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향점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지향 없는 삶은 바람따라 떠도는 나뭇잎이지, 바람을 타고 흐르는 민들레 씨앗이 아니다. 씨앗은 땅에 박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싹을 틔우려는 지향이 있지만, 이땅 저땅을 가리지 않는다. 옥토면 어떻고 돌 틈이면, 아스팔트 위면 또 어떠하랴!

그리고 자유로운 것은 외부의 힘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 처지, 믿음으로부터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외부의 기준과 개념들에서 벗어나 세상을 온전한 내면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자신의 시각을 벗어나 ‘그저 그렇게 보는 것’을 자유라 한다. 자신의 시각은 자신의 마음일 뿐 ‘거기에 놓인 그것’은 아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르게 볼 수 있다. 사유하는 인간은 할 수 있다.
 
순천 남산 야경

언제나 좋은 것이란 없듯이, 자유도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이 적지 않다. 먼저 속도를 포기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이 움직이기 위해 빨리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빨리 가려면 앞에 집중해야 하고 옆이나 뒤를 돌아볼 수 없다. 우리 몸도 그렇다. 느긋하게 걸으면 이것저것 살펴보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수 있지만, 빨리 달리기를 하면 몸과 마음이 온통 균형 잡고 앞을 보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안정을 포기해야 한다. 안락함이나 유대감은 자신을 낮추고 무릎을 꿇고 그곳에 들어가야 생긴다. 얻는 것이 있으니 당연히 잃는 것이 생긴다. 우리 몸에서 가장 자유로운 관절인 어깨는 쉽게 빠지고 아프다. 그리고 명성을 포기해야 한다. 명성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니, 남의 눈길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하다.

순천이라는 변방의 경계에 선 나는 잃은 만큼 자유롭다. 요즘 자유롭지 못한 사람, 노예를 자주 본다. 어버이나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자식을 얻고자 한다.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는 정신적 노예의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을까?

순천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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