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일암 본당

 불일암


불일암(佛日庵)에 가려면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 청량각 입구에서 왼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약 150m를 지나 첫 번째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 길로 바로 가면 된다. 또 송광사에서 구산선문(탑전)을 지나 오른쪽 오르막 비탈의 오솔길을 약 150m 돌아가면 직접 올라온 길과 만나 7~8m 앞에 갈림길이 나온다.

▲ 불일암 입구 이정표

주인이 만들어 세운 듯한 ‘ㅂ’이란 푯말이 이채롭다. 2003년 봄까지는 법정 스님이 직접 만들어 세웠다는 작은 푯말이 서 있었다. 그 푯말이 세월이 다했던지 지금은 지름이 한 뼘 정도 되는 편백 통나무를 다듬어 위에는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고, 앞면 위아래로 ‘ㅂ’, ‘ㄱ’과 함께 새겼다. 밑에는 화살표를 가늘게 새겨 놓았다. 아마 법정 스님이 만들었던 푯말의 의미를 존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ㅂ’은 불일암이고, ‘ㄱ’은 광원암을 줄여 적은 것이다.

푯말을 지나서 작은 개울을 건너면 대나무 숲길로 접어든다. 바람의 속삭임을 벗 삼아 고즈넉한 대나무 숲이 끝나고, 왕시누대로 둘러싸인 언덕을 돌아가면 가슴높이의 외로운 사립문 하나가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이곳이 불일암이다.

▲ 불일암 사립문

지금의 불일암은 자정암(慈靜庵)이 있었던 곳이다. 송광사의 제7세 자정 국사께서 창건하였다고 구전되어 온다. 하지만 자정 국사의 비문이 사라져 국사의 자세한 이력은 알 수가 없다.

▲ 자정국사 탑

그나마 일부 자료에 1301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정암 동편(약 25m)에 세운 국사의 탑과 송광사에 전해오는 탱문이 시호(慈靜)와 탑호(妙光)를 알려주고 있다.

1792년(정조 16년) 와월교평(瓦月敎萍) 선사가 수집한 ‘송광사 사적’ 중 국사들의 약력 편에 자정국사의 휘(諱)가 일인(一印)임을 밝히고 있고, 국사의 송광사 주지(제7세) 부임 시기(1293년. 충렬왕 19년)를 통해 비교 추정하는 것이 『송광사지』의 국사에 관한 기록 전부이다.

자정암은 국사께서 주지로 부임한 1293년 직후 창건으로 추정되며 자정암(불일암) 오른쪽(동쪽) 약 25m 지나 언덕에 건립한 ‘자정 국사 묘광지탑’은 송광사의 주지 계보에 따라 제7세 주지 임기가 끝난 때를 국사의 입적 시기로 보아 1301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자정암은 8․15광복 이후까지 계속 스님들이 거주하였으나 여순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빈터에 1975년 법정 스님이 불일암으로 새롭게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정암 터(불일암)의 위치는 대웅전으로부터 서북방 약 500m 거리의 높이 456m의 국사봉(망수봉)의 동남 산비탈이다.

자정암은 이 봉우리의 안쪽 효령봉(송광산)이 아득하게 눈에 잡히는 한적한 비탈에 큰절을 향해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불일암은 자정암 터에 본당과 공양간을 겸한 작은 요사채만 되살렸다. 하지만 자정암 당시의 건물 위치와 규모, 형태가 다르게 조성되었다. 『사지』에 등장하는 자정암 건물은 본당(서익실)과 정문, 공루, 칠성각 등으로 구성되었다

60년대 말까지 남아있던 폐건물은 현재 불일암의 본당이 있는 위쪽에 산신각(칠성각)이 있었고, 그 밑 화단으로 비어있는 장방형의 넓은 2단에 큰 건물의 잔해가 있는 본당 터였다. 그것은 송광사 사고 지도편의 도면과 같아 확인할 수 있다. 도면상의 공루 위치는 본당의 정면이다. 

현재 1단 석축 바로 밑(앞)에 해당하며, 정문은 지금의 입구 쪽이 아니라 큰 절에서 곧장 올라오는 반대편(대나무 숲)이 본래의 길이었으므로 현재 해우소의 오른쪽(西)에 해당하며 각각의 터로 보이는 자취가 남아 있다. 

▲ 불일암 해우소

큰 교육장을 운영했던 자정암에 서익실 이외에 요사채가 없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사고’의 옛 도면을 보면 2단(가운데)의 본당 터 크기가 말해주듯 현재의 요사채가 있는 곳까지 건물이 이어져 본당의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당에 달아내어 증축한 건물의 형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요사채 아래 우물이 있으므로 서쪽의 끝은 지금처럼 공양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정암 터는 축대가 3단이 넘는 송광사의 암자 터 중 가장 많은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단 본 축의 바로 밑 대나무로 덮여있는 비탈을 살펴보면 석축은 없어도 약 1m 높이의 언덕 위에 인공으로 다듬은 터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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