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의 이름은 ‘조계총림’, ‘대승 선종’ 조계산 송광사이다. 행정구역상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있다. 순천의 중심 시가지나 광주시로부터 한 시간 거리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 선사가 30여 명의 대중이 수도하는 ‘송광산 길상사’로 창건하였다. 고려 명종과 희종(1117-1206) 대에 이르러 보조국사가 9년간 중창을 하여 절의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당시 지눌이 제창하던 불교 승풍 쇄신운동인 정혜결사의 중심 도량이 되면서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이름인 송광사로 바뀌었으며, 창건 후 여덟 차례 중창과 쇠락을 거듭하는 동안 16국사를 배출하였다. 광복 이후 근세에 이르러서도 ‘효봉’, ‘구산’과 같은 걸출한 선승을 배출하면서 승보종찰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송광사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국보 3점, 보물 16점)을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유물이 국보와 보물급에 해당하는 문화재로, 송광사 그 자체가 유무형의 보물인 셈이다.

송광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60여 전각과 주변에 경판전, 부도전, 탑전과 함께 다섯 개의 암자가 있다. 『송광사지』(1924)에 의하면 소속 암자가 17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남아 있는 암자 터는 20곳이 넘는다. 그러나 지금은 감로암, 불일암, 광원암, 인월암, 천자암 등 5곳의 암자와 경전을 관리하는 화엄전, 부도(탑)를 보살피는 부도전, 구산대종사의 탑비와 함께 세운 구산선문 안에 적광전(탑전)이 있다.  
 
광원암(廣遠庵. 서암)

광원암은 서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송광사의 제2세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구전되어 온다. 진각국사를 상징하는 암자이다. 이를 입증하듯 본당의 뒤(북)편 언덕(약 25m)에는 ‘진각국사원조지탑’이 모셔져 있다.

송광사의 북쪽에 있는 광원암을 서암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보조암을 본암으로 기준 삼아 방위를 결정한 송광사만의 특별함이다.

광원암(터)은 송광사의 입구 매표소와 일주문 중간지점 왼쪽(동북)의 아늑하고 포근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으로부터 약 600m 지점에 있다.

광원암(터)이 있는 골짜기의 이름은 서부대골이다. 그러나 주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골’자를 생략하고 ‘서부대’라고 불렀다. ‘서부대’의 어원은 서부도에서 왔다고 한다. 광원암을 서암이라고 불렀듯 광원암에 있는 진각국사 탑을 서부도라고 불렀던 것이 훗날 발음이 변해 서부대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광원암이 암자 이름뿐만 아니라 지명에도 서(西)자가 들어있는 것은 지난날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4방위 암을 수호의 상징으로 중요시하여 본명보다는 동서남북 방위의 별칭으로 많이 불렸기 때문이다. 

광원암에 대해서는『송광사지』에도 송광사의 제2세 진각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 무령왕 14년(514) 갑오 6월 가규 사(可規 師)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상량기 내용이 발견되었다. 진각국사의 초창이 아닌 것으로 규명되기는 하였으나 구전의 의미를 새겨볼 때 사람들로부터 잊혔을 만큼 오랜 세월 비어있던 곳에 국사께서 중창하였거나 아니면 그럴만한 인연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광원암은 ‘진각국사원조지탑’이 모셔 있을 뿐만 아니라『송광사지』에 전해오는 기록 일부만으로도 진각국사를 통한 법력을 이어받아 번창했던 송광사의 수도 강원암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조지탑을 세운 1235년 이후 1700년대까지 500여 년 동안 큰스님들의 주석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중창과 중건, 중수가 계속되었다. 1700년대 말부터는 당시 송광사를 이끌던 와월 우담 금명대사 등 큰스님이 잇달아 주석하여 수많은 후학과 전국 고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끝내 문을 닫았고, 1958년에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본당을 훼철하기에 이르렀다. 

광원암으로 가는 길은 송광사에서 종무소 옆 천을 따라 내려가 산사체험관(감로암, 부도전길 입구)을 지나 탑전 입구(해탈교)에서 편백림 사이로 하천 오른쪽의 산비탈 길로 올라간다.

탑전 입구에서 150m 지점에 도착하면 청량각 입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 불일암 길과 나뉘는 삼거리를 만나 오른쪽의 완만한 길로 몇 걸음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지금의 건물은 본당이 마지막으로 훼철되고 34년이 지난 1992년, 현봉스님 (2000. 1~ 송광사 주지 역임)의 간절한 원력에 힘입어 본당과 요사채로 복원하였으며, 2008년 봄 적취루와 가규당을 새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증축 전의 광원암
▲ 송광사 광원암

전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광원암 본당은 남향으로 송광사 청룡줄기의 맥인 조계봉(제짜봉)을 향해 정좌하였다. 입구에 본당과 함께 지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소규모 요사채가 본당의 측면을 보고 있어 ‘ㄱ’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새롭게 전면 5칸, 측면 2칸의 요사채 가규당과 반누각 형태인 전면 6칸, 측면 2칸의 요사채 적취루가 본당 오른쪽에 ‘ㄴ’자형으로 배치하여 반쯤 열린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옛 광원암의 건물이 어떤 형태와 구조를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을 보면 본당과 정문인 적취루를 비롯하여 별실과 공루 등으로 이뤄졌고, 정문의 문루 편액이 적취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당의 왼쪽을 제외하고는 옛 건물의 구조와 다른 모습이 상상이 된다. 새로 지은 요사채의 명칭, ‘가규당(可規堂)’은 초창자로 알려진 가규선사의 법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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