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훈
여수YMCA 사무총장
대학교수들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 앞을 분간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 해를 보내며 가장 적절하게 정리해주는 네 글자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는 우려를 넘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당을 빨간색으로 위장해가면서까지 정권을 잡더니 이제는 도대체 어떤 끝을 보자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독선과 불통의 철권정치를 펼치고 있다.

세월호로 상징되는 안전 무능, 가진 자들을 위해 약자들이 희생하게 하는 경제 폭압, 통일 대박을 외치면서 남북관계는 더 불안하게 만드는 안보 불능, 여야 가릴 것 없이 무릎 꿇리는 정치 실종 외에, 집권 기간 박근혜 대통령이 또 달리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참다못해 들고 일어서는 민주주의 함성은 차벽과 물대포로 막는 것으로 부족해, 복면 쓴 이슬람국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내친김이었을까. 아버지 과거도 세탁하거나 미화하고 자신의 뒷감당에도 필요한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한달음에 해치우고 있다.

이러니 혼용무도하다는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한편으로, 만일 나에게 사자성어가 아닌 문장 중에서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다음 시 한 편을 주저 없이 꼽겠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몇 년 전 겨울, 그 유명한 광화문 교보문고빌딩 글판에 실렸던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다. 빠르든 느리든, 강자든 약자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누구에게나 새해는 찾아드는 것이며 심지어 바위처럼 움직일 수조차 없는 이에게도 새해는 주어진다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담담하게 나열한 시구인데도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평등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올해 여수에 사는 청소년들은 이 시에 더욱 절절한 울림을 받아야 했다. 시민의 대표인 시장의 난데없는 명문고 타령 때문이다. 시장은 여수의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것이 지역에 명문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다 보니 우수한 학생들은 타지로 빠져나가고 여수에는 뒤처진 학생들만 남아 출세도 못 해 지역 발전도 못 한다는 것이다.

황새와 말은 날고뛰어서 가버리고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만 남아 있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새와 말을 잡아둘 사립외고와 같은 명문고를 만들자는 것인데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 해도 기분이 묘할 뿐이다. 공감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사자인 지역 청소년들에게 물어보았다. ‘여수청소년YMCA’ 회원 100여 명이 ‘자치포럼’을 열고 쏟아낸 그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초중 의무교육 기간과 고등학교 무상교육 기간 모든 학생이 경제적인 차별을 받지 않고 균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둘째, 대학입시만이 아닌 건강하고 다양한 진로를 안내하고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학교라면, 셋째, 교육정책과 학교환경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과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참여시키는 사회 인식이 조성된다면 청소년 누구나 행복하고 부러워하는 여수가 될 것이란다.

혼용무도 세상에서 달팽이, 굼벵이가 열심히 꿈틀거리는 가운데 2015년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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