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집 『파랑 또는 파란』


 
13년 만에 시집 『파랑 또는 파란』을 들고 나타난 송태웅 시인의 시는 온통 하늘과 산과 바다와 황야를 향하여 시선이 고정돼 있다. 멀고도 높고도 깊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앓는 듯 하다 가는 금세 가깝고도 낮고도 얕은, 자기 앞의 생으로 돌아오고 만다. 자연과 인간, 이상과 현실, 역사와 일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선순환 하는지 악순환 하는지 모를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의 진정을 지키려는 한 인간의 고투가 가슴에 다가온다. 광주의 1980년 학번으로서 역사의 격랑에 기꺼이 동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 인간으로서의 패배와 그 좌절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시편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빈집에 홀로 남아 몇 날 며칠
무료해진 백구처럼
나도 저 망망을 향하여
소리쳐 울어야하리
그대 저 수평선 건너
둥싯 내게로 오라고
백골처럼 서 있는
저 등대 불빛 향해
노 저어 오라고
(성산 바다)

아마도 제주 체류 시절에 썼을 것 같은 이 시는 망망한 바다 앞에 서서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와 그리움을 절망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수삼 년 전화 한 통 없던 이가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듯이
무심한 사람
제 솔가하던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세간은 탕탕히 깨먹고는

마침내 스스로 유배 온 사람처럼
담 없는 담 안에서
오일장에 나온 강아지의 눈빛으로
흙먼지 쌓인 마루에 앉는데
(유적)
 
‘유적’이라는 시를 읽으면 이 시인이 한계적 고립감이나 절망감 속에서 얼마나 마음의 현을 평탄하게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는지 그 치열함이 가슴에 다가온다. 삶이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모순의 중첩이며 누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걸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밥 먹고 발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이야말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목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려는 듯하다.

이 시집의 제목인 ‘파랑 또는 파란’을 보면 그러한 태도나 의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생은
한 필지의 주민등록지 위에 내리는
폭우와 싸워나가는 것

내 영혼이 노쇠한 낙타처럼
더 이상은 어디로도 갈 수가 없을 때
비로소 생은
신축 교회의 십자 네온사인 같은
헛된 경전을 집어던지고/겨우 허름해질 수 있는 것
(파랑 또는 파란)

‘한 필지의 주민등록지’는 시인이 한 여자를 만나서 아기를 낳고 돈 벌어와 밥해 먹고 생활을 유지해가는 삶의 현실일 것이고, ‘신축 교회의 십자 네온사인’은 시인의 이상을 혼돈케 하는 또 다른 삶의 현실일 것이다. 현실과 이상은 이처럼 늘 중첩되며 배치되며 모순을 빚는 것이라는 것을 시인은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다.

 ‘구식 변소에 앉아’ 시에선 송태웅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읍내에서 나랑 비슷한 중년 사내랑
소주에 낮술하며 먹은 산낙지
벌어진 이 틈에 끼어/참 질기게도 씹히는군
생의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버리지 못할 그리움은 더 질긴 것인가
(구식 변소에 앉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다 다르지만 어찌보면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조금 잘살고 못살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결국 인연이라는 고리로 묶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벌어진 이 틈에 끼어 참 질기게도 씹히는’것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포기하지 말고 화합을 도모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시인이 노래하는 의미이지 않겠는가.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고민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한권의 시집이 던지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꽤 크고 아프고 따뜻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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