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12>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해방정국(1945-48)은 한국현대사의 원형을 이루는 중요한 시기이다.『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송건호가 “8․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에서 일탈했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건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해방정국은 한국현대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역사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해방정국은 크게 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 국면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 좌우세력의 대칭적 배열이 이루어졌던 1945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두 번째 국면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좌우세력이 갈등하였던 1945년 말부터 1947년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이때는 신탁통치 파동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 첨예하게 발생했다. 세 번째 국면은 제2차 미소공위 결렬로 인해 단독정부 수립이 분명해지면서 정치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던 1947년 후반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이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은 반공 분단체제로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는 남한에 수립된 반공국가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반공 분단체제가 제주 4ㆍ3사건과 여순사건을 진압하면서 구축된 ‘희생적 질서’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근대국가는 폭력의 독점과 국민적 통합을 통해 형성된다. ‘희생적 질서’는 폭력의 독점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자 국민적 통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형성과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반공 분단체제의 희생적 질서는 1948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 이후 제주도에서의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여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게릴라 토벌작전은 내재적으로 민간인 학살(Genocide)과 연결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게릴라 활동은 정규군과는 달리 지역주민들과 의존적 관계를 맺고 게릴라와 지역주민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군의 게릴라 토벌 전략이 제주도에서의 토벌작전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악명 높은 삼광작전(三光作戰)이었다. ‘다 죽이고(殺光)’, ‘다 태우고(燒光)’, ‘다 뺏어버린다(搶光)’는 삼광작전은 게릴라와 지역주민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삼광작전은 1941년 7월 일본군 동북지역 사령관이었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새로운 게릴라 소탕작전을 채택하면서 만들어졌다. 일본군은 아시아ㆍ태평양 전쟁 시기 중국의 동북지방을 비롯하여 만주, 동남아지역에서 지역주민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작전을 사용한 전력이 있다. 삼광작전이 해방 이후 국군에 의해 재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진압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일본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진압군의 지휘자로 부임한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후임으로 온 최경록은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준위로 근무하였다. 그밖에 초토화 작전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함병선은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1949년 3월에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인 유재흥도 일본군 출신이었다. 일제 경찰로서 만주에서 활약한 바 있는 홍순봉은 1948년 10월 이후 서북청년회를 지원하며 유혈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다. 

제주 4ㆍ3사건은 일상의 테러와 강제이주, 계엄령 선포, 초토화 작전 등 선택적 폭력과 무차별적 폭력이 혼용된 ‘폭력의 시험무대’와 같았다. 여기에서 진압군의 지휘관들은 일본군이 게릴라 토벌작전에서 적용하였던 전략과 전술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물론 미군의 대 게릴라전투 교리와 경험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이들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동족에게 무슨 일이든지 자행할 정신 상태에 있었고, 그렇게 되도록 일제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 1946년 10월 항쟁 시기 한 미군이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의미는 여러 가지를 곱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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