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배선의 걸으면서 배우는 조계산(6)


 

▲ 대승암 본당

남암으로 잘 알려진 대승암(大乘庵)은 선암사에 현존하는 네 개의 암자 중 하나이다. 1800년대 침명, 함명, 경붕, 경운, 금봉 등 남암 문도 출신 5대 강백이 활약하던 시기에 전국에서 승려들이 모여들어 큰 절에 버금가도록 이름을 알렸던 암자이다.

대승암은 선암사(조계산)의 20곳이 넘는 암자 중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유일한 암자이다. 암자 터 주변의 지형은 다른 골짜기들처럼 두 줄기 사이에 협곡을 이루지 않고, 우측(암자에서 보아) 백호의 내 목을 따라 작은 골짜기를 형성할 뿐 넓고 완만한 형태가 백련암들로 이어져 큰절의 입구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대승암 터는 위치와 형태가 작은 암자 하나만을 보듬기에는 입구와 주변의 품이 넓어 보인다.

대승암으로 가는 길은 선암사 입구(삼인당)에서 서부도전 앞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들어가 작은 개울을 건너 오르는 것이 본래의 길이다. 지금은 송광사(굴목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80m 지점의 대승암 삼거리에서 좌측 차로(비포장)를 따라 백운암 터 앞을 돌아 숲으로 들어간다. 완만한 길을 따라 300m 정도 올라가면 입구의 길 왼쪽에 정문으로 통하는 옛 길임을 알려주는 두 개의 입석이 있다. 주변의 숲에는 전성기를 알려주듯 곳곳에 집터의 흔적이 눈에 띈다.

대승암 본당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으며, 산신각과 문간채, 그리고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당은 자연 그대로 거칠게 정돈한 석축 위에 석자 가량의 자연석 기단을 쌓아 정면 5칸의 좌우 1칸에서 앞으로 각각 3칸을 끌어낸 ‘ㄇ’ 형 건물로 측면은 각각 팔작, 좌우 전면은 맞배 지붕을 하고 있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본당의 뒤편에는 작은 규모의 산신각이 있고, 입구의 대문은 문간채를 겸하고 있다.

▲ 대승암 설경

대승암 역시 옛 건물은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퇴락하여 철거하고, 1999년(주지 지허)에 다시 세운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노스님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암사의 사세 하락이 계속되어 광복 직후에는 대승암도 명맥만 유지되어 몇몇 스님이 직심으로 자리를 지켰으나 다른 암자와 마찬가지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집을 비워 그나마도 완전 폐허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의 청장년들이 이곳을 도박, 유락장소로 사용하면서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경 헐어 버렸다. 그 후로도 움막 형태로 대승암 터에서 법을 보고자 하는 혈기 있는 스님들이 끊이지 않던 중에 대승암과 인연을 가지고 있던 도백(허경만)의 관심과 지원으로 1999년 현재의 건물이 힘겹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증언자는 대승암의 원형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운수암(雲水庵)

▲ 운수암 관음전

운수암(雲水庵)도 선암사(조계산)에 현존하는 네 개의 암자 중 하나이다. 큰 절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남북 방위를 상징하는(동:청련암, 서:대각암, 남:대승암, 북:운수암) 암자가 각각 있다. 1700년대 이후 대승암(남암)과 각축하며 많은 강백과 선덕을 배출한 선암사 대표 암자이기도 하였다.

선암사 후문을 나아가 중수비를 지나면 맞은편 언덕 약 150m 거리에 있는 운수암은 본당인 관음전에 관음보살상을 모셨고, 삼성각과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두 길 높이의 축대 위의 중앙에는 본당인 팔각지붕의 관음전이 자리 잡았고, 오른쪽으로 나란히 삼성각이 자리했다. 왼쪽의 구석진 자리에 낮게 지은 요사채는 시골의 여느 살림살이 집과 다르지 않다. 이전의 건물 규모는 지금보다는 컸으나 대각암이나 대승암처럼 크지는 않았다는 것을 터의 구조로 알 수 있다. 삼성각은 지금보다 뒤편에 있었으며, 입구인 삼성각 오른쪽으로 요사채가 있었던 주춧돌 흔적이 남아 있다.
2006년, 입구 오른쪽 맞은편에 새로 지은 네 칸 맞배지붕의 만월당은 기존 건물들과 달리 규모는 크지 않지만 훤칠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운수암 중수기(번역)

▲ 운수암 중수기

『운수암은 선암사 북쪽에 있기에 북암이라 속칭되고 운수납자들이 수도하는 곳이므로 운수암이라 명한다.

운수암 연혁은 다오 화상이 편찬한 운수별업 중창기에 실려 있다.
선암사는 옛날부터 소속 암자가 많아서 동암인 청련암, 남암인 대승암, 서암인 대각암, 북암인 운수암을 위시하여 비로암, 향로암, 내원암, 선조암 등 30여 개의 산내 암자가 있었다.

그중에 대승암은 침명, 함명, 경붕, 경운, 금봉 등 5대 강사가 속출하여 강원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으며, 대각암은 대각국사가 주석하였던 곳으로 국사의 진영 및 유물들이 보존된 성지이고, 운수암은 해붕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 선덕과 강백들이 종풍을 거양하던 제일의 수도장이었다. (벽파문도)

선암사는 여순반란 및 6.25동란 당시 피해가 심하여 주승들이 사방으로 산거하게 됨에 청련암 향로암 등 대부분의 암자가 폐암되고, 대승암 대각암 운수암의 세 암자만 겨우 남아 있었다.

그 뒤 소위 이승만 유시로 야기된 불교 분쟁이 20여년 계속됨에 선암사는 더욱 피폐되어 대승암마저 폐암되었고, 운수암은 거승이 없어 당우가 퇴경 전답이 황무하여 거의 폐암의 직전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 운수암을 다시 중수 재건한 분이 만성화상이다. 화상은 법호가 계선이며 한국불교태고종 전 총무원장 덕암 대종사의 상족 제자이다. 말년에 만행 차 호남 각 사찰 순례 중 선암사에 들렀다가 유서 깊은 운수암이 황폐된 것을 보고 분연히 중수할 뜻을 품어 을미 1979년 동부터 경신년 중동까지 1년 여에 걸쳐 손수 형극을 헤치고 도로를 열며 교량을 놓고 시록을 모하며 군 당국에 교섭하는 등 70 노구로 천신만고 끝에 총공사비 1천6백여 만원으로 관음전 11평, 삼성각 5평, 암사 17평을 새로 지었다. 

건축 도중 목재 부족으로 고심하던 때 풍설로 송백목 수 십주가 뿌리 채 뽑혀서 건재에 보태 쓰는 천조가 있었다. 또 황무된 전 천여 평, 답 삼백 평을 개간하여 주경야선으로 수도의 구실을 갖추었다. 이 대작불사는 선암사의 경행인 동시에 한국불교계 전체에도 희유한 일이다  

이에 만성화상의 노고와 공덕을 찬양하고 아울러 운수암의 무궁한 흥강을 축원하는 뜻에서 위의 전말을 간추려 기한다.  『경신년(1980년) 11월 7일  길상산인 운재 이영무 기』
 
 

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올 6월‘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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