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배선의 걸으면서 배우는 조계산(5)

 

▲ 대각국사 중창건도기


대각암(大覺庵)  

선암사 주변의 여러 암자 중 대각암은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의 열아홉개 암자 중 현존하는 네 곳 가운데 하나이다. 선암사에서 4방위로 구분한 위치에 따라 ‘서암’이라고도 부르고, 옛 이름이 ‘부도암’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 대각암 본당

대각암의 옛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1770년경 ‘회순주지시상량문’에 대각암 스님의 수가 57명이라는 내용과 1938년의 ‘제4중창 상량문’에 상월선사 중창시의 상량문이 인용되어 있다.  

내용 중에 “또 다른 이름으로 부도암이라 하였으며, 제2중창은 순치연호원년갑신(1644년) ‘탄원’선사가 했고, 옹정 연호 을묘년 윤6월(1735년) 벽천선사가 3중창을 하여 상월선사를 이어 계속해서 큰스님들이 주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창의 기록을 정리해 보면 1644년(탄원선사) 중창 → 1735년 3창(벽천화상) → 1860년 중수(청공화상) → 1938년 4창(춘광, 성암) → 2005년 중수 및 1780년 이후 각종 상량문에 암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1644년 이전의 정확한 역사는 기록으로 보전되지 않고 일부 유물만 전해내려 오고 있다.  

대각암은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의 장본인 의천을 상징하는 암자이다.(대각국사가 세워 주석했던 암자라고 전한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고려 문종(1046~1083)의 넷째 왕자로서 11세에 출가하여 47세에 입적하기까지 왕권과 호족간의 정치적인 대립기에 송나라에 유학하여 수많은 장경을 수집하고 천태종을 개창한 우리나라(고려) 불교의 선각자이다.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창건을 능가하는 고려 제일의 거찰로 중창할 때 대각암에 주석하였으므로 선암사를 대표하는 암자로 받들고 있다.   

대각암에는 최근에 중건한 본당과 누각 형식의 대선루(待仙樓)가 있다. 대선루 앞에는 방화수를 겸한 커다란 사각 연못을 만들어 경관이 돋보인다. 
 
대각암 부도

대각암 부도는 본당의 후원 언덕에 있다. 통일신라의 기법으로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각국사 부도라는 근래의 주장과 도선국사가 선암사를 창건할 때 동․북부도와 함께 지기 진압을 위해 세운 탑 성격의 부도라는 옛 스님들의 구전이 대립하고 있다. 

1988년 선암사 스님들이 사리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교수와 군청 직원 입회하에 부도를 해체하였으나 사리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혜강 전 스님 증언)

선암사에 있는 대각국사와 관련된 유물 기록은 모두 당시가 아닌 50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수록한 것이므로 추정에 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천이 송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천태종을 창건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시기가 있었으니 기간은 알 수 없으나 이때가 선암사(대각암)에 주석했던 시기로 보인다. 
 
비로암(毘盧庵)

▲ 비로암 본당

 선암사 창건의 전설과 ‘아도화상’을 상징하는 비로암은 조계산 정상 장군봉에서 남쪽으로 열려있는 골짜기의 해발 570m 지점의 양지바른 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선암사가 거느린 4개의 암자 중 큰절로부터 현대식 교통이 단절된 첩첩산중의 수도처로서, 전성기때의 30개가 넘는 도량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는 암자이다.

구전에 의하면 비로암의 역사(백제 성왕6년 528년)는 약1500년에 이른다. 그러므로 기록으로 인정하는 도선국사의 창건(875년)으로부터 300년 이전이다. 현재 선암사에서 알 수 있는 비로암에 관한 기록은 ‘조계산 선암사 사적비’에 “1652년 비로암을 중수하였다”는 단편적인 내용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그 이전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이후 각종 상량문에 나타나는 명칭과 인원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나 1939년 대각암 상량문의 명칭이 마지막이다. 광복을 전후하여 옛 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 움막 형태로 다시 세워 점차 확장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유천년(괴목리. 87세) 옹에 따르면 1945~6년(25세)에 자신이 철거했는데, 그때는 이미 스님들이 살지 않은 빈집으로 본당과 문간채(현재 요사채 자리) 모두 기와집이었으나 철거한 목재는 이미 썩어 주변에다 모두 버렸다고 증언하였다. 

광복을 전후하여 완전히 사라진 비로암은 선암사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던 30여 년 동안 빈 하늘을 이고 숨죽이던 중에 1977년 지허 스님이 토담 움막을 지어 용맹정진의 토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약 2년 후 하산하였으나 뜻있는 스님들의 한철 수련장으로 활용하였다가 1988년을 전후하여 혜강 스님이 2년쯤 기거하였고, 1993년 향산 스님이 드디어 법당을 확장하여 현재의 건물로 중수하였다.

법당 내의 천장에는 ‘불기 2537년(1993) 계유 양 4월 24일 오시 상량 향산’이라는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 향산스님의 뒤를 이어 금봉스님이 7년 정도 자리를 지키며 돌탑, 식목 등 주변 환경을 가꾸었고, 뒤를 이어 2003년 4월부터 승전스님이 지켜오고 있다. 법당의 비로자나불은 2005년 봄에 모신 것이다.

 

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올 6월‘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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