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의 ‘식민지 유산 ’의 한국현대사<11>

▲ 강성호
순천YMCA 간사
파시즘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형태의 반공주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를 거부하면서도 강력한 국민 통합을 이룩하려고 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극히 한정적인 역사적 경험이었다. 분단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는 ‘국민’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국민 만들기’의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사상적으로 극복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중심 사상을 세울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일민주의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승만 정권의 초기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일조한 사람들의 이력이다.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일민주의는 1949년 4월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여기에서 양우정(梁又正)이라는 사람은 안호상과 더불어 일민주의를 체계적인 사상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는 사실 식민지 시절 카프, 신간회, 적색농조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했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전향한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논설가로 활동하였고 이승만의 세력기반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선전부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양우정은『이대통령 건국정치이념』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이승만의 노선이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이승만은 1949년에 일민주의를 제창한 뒤 한동안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일민주의가 다시 상기된 계기는 이승만이 1951년에 자신의 정당을 조직할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였다.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당시(黨是)로 내건 정당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일민주의를 제창한 이후 일민주의 정당을 가지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여기에서 새누리당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자유당은 일민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만들어졌다.

자유당의 문건에는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 강령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자유당은 공식적으로는 일민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협동’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협동주의는 1930년대 일본 지식인집단의 정치사상에 기반을 둔 개념이었다.

(후지이 다케시). 전시체제기(1937-45)에 일제는 ‘동아협동체’를 내세우며 새로운 제국적 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협동주의를 부각한 적이 있다. 이것이 한국전쟁 시기에 자유당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제시된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현대의 민주주의 정당과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자유당은 외형상 국민 전체를 중첩해서 포섭한 국민 정당을 표방하였고, 이승만을 유일지도자로 떠받들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이라는 개인의 사당(私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일민주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승만이라는 지도자를 따르고 복종할 것을 강조하며 파시즘적 면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 정권은 일종의 영도자 국가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국민회, 대한청년단, 학도호국단, 대한노총, 대한농총, 대한어민회 등의 총재를 맡았고,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대한부인회의 총재였다. 즉, 이승만은 18세 이상의 남녀 성인, 청년, 중등학교 이상의 모든 학생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어민들의 영도자였던 셈이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국민을 2중 3중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을 정점으로 한 유일절대의 영도자국가를 지향하였다. 여기에서 일민주의는 영도자를 중심으로 한 일민(一民)을 강조하며 이승만의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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