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현
순천여고 교사, 순천대 강사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제 손으로 지은 농산물을 팔았습니다. 1년간 정성들여 기른 대봉을 밭떼기로 넘겼습니다. 감을 딸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3년 전부터 30평쯤 되는 텃밭과 20~30년 된 감나무 40주 정도를 가꾸고 있습니다. 백면서생인 제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저어했는데 청소년기에 부모님 농사를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잠재적 교육과정과 노작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기도 했고요.

전정, 거름, 농약, 풀베기 등
저도 감농사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지난겨울 감나무를 전정하고 거름(닭똥)을 주었습니다. 한여름엔 긴 소매, 긴 바지, 모자, 마스크, 고글로 ‘완전무장’을 하고 닭똥같은 땀을 쏟으며 농약을 쳤습니다. 첫해(재작년)에 농약을 안 하고 버텼더니 잎은 물론 감이 거의 다 빠져버리더군요. 감 농사짓는 주변 분들의 보이지 않는 따가운 눈총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감똘개’ 지고 나서 유월에 세 번, 7월과 8월에 한 번씩 농약을 쳤습니다. ‘자닮’ 등 친환경 유기농 약제를 알고 있었지만 주말농부인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감나무 아래 풀은 4월부터 9월까지 예초기로 네 번 베었습니다. 감밭이 400평 정도 되기 때문에 저같은 짝퉁 농부는 하루에 다 베지 못하고 이틀에 걸쳐 베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지켜본 프로 농군 윗밭 아저씨는 “보기와는 다르다”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가뭄과 폭염을 이기고 익어가는 감
아시다시피 올여름에는 비가 부족했습니다. 땡볕은 작살과 같이 내리꽂혔고요. 그래도 우리 지역은 극단적인 가뭄은 아니어서 감은 엄청난 폭염 속에서도 무럭무럭, 토실토실하게 잘 자랐습니다. 예상치 않은 현상이 나타나 잠시 마음을 졸인 적도 있었습니다. 9월 초쯤 아직 감이 익을 때가 아닌데 일부 감이 붉게 물드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윗밭 아저씨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해서 농업기술센터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햇볕이 너무 뜨거워 잎이나 과실이 화상을 입은 ‘일소(日燒)현상’이라고 하더군요. 사전(辭典)을 찾아보았지만 등재되지 않은 단어였어요. 뙤약볕에 덴 ‘애’들은 다행히 마지막까지 잘 익어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감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운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흐뭇한 마음으로 “허, 그놈 참! 작년보다 훨씬 크고 좋네!”하면서 입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제 옆지기는 “자기네 감이나 되는갑소!”라며 저를 놀렸습니다.

20㎏ 50~60 상자를 50만원에
제가 판 감은 40주의 절반인 대봉 20주입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일명 ‘콘테이너’(네모난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로 50~60개 정도 나올 양이라더군요. 저는 내심 100만원은 받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감 장사는 50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실망스러웠지만 저는 “10만원만 더 달라”고 흥정을 했습니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대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너무 싸게 넘긴 것 같아 속상해
전화로 계약을 마친 뒤 감밭에 갔습니다. 감들이 유난히 크고 잘 생겼습니다. 돈을 목적으로 감농사를 지은 건 아니었지만 애들을 너무 싸게 넘겼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심정이 복잡했습니다. 계약을 취소하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다시 감을 보았는데 퉁실퉁실 정말 잘 생겼습니다. 제 눈에 잠시 물기가 돌았습니다. 거름값, 농약값, 기름값에 불과한 돈을 받고 이 애들을 넘기다니. 제 정성과 노력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일한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농민들
농산물 가격이 ‘똥값’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안 건 처음입니다. 이래가지고 농민들은 어떻게 살까? 농부들의 팍팍한 삶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는 분들’께 새삼 존경심이 들었고 농민의 자식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보성 농부 백남기 씨가 왜 시위대의 선봉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백남기 농부의 회복을 간절히 빌면서, 내년에 우리 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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