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훈
여수YMCA 사무총장
영화 ‘베테랑’에서 인상적인 등장을 해 새삼 화제가 된 단어가 어처구니이다. 맷돌의 손잡이로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막상 빠지고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 녀석이다. 콩밭에서 비지땀 흘려가며 따다 도리깨질 열심히 해 추려낸 후 잘 씻고 불려 비로소 맷돌에 넣어 갈려는데 어처구니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정말 어처구니없다. 

20여 년 전쯤 광주천 둑 한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오가도 못 하고 서 있게 되었다. 갑작스런 소나기로 물이 좀 불긴 했지만 평소 가로질러 다니던 둑길인지라 별 생각 없이 건넜는데 그만 물살이 발목까지 찬 것이다. 급류도 아니고 겨우 발목이 잠겼지만 한발을 떼는 순간 휩쓸려 내려갈 판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냥 서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지나던 한두 사람이 호기심에 쳐다보면서 어떻게 잘 빠져나와보라고 격려를 했다. 그 남자도 이 어이없는 상황에 머쓱한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뒤늦게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파악한 구경꾼들이 119를 불러 구출에 나서고 마침 지나던 지역방송차가 이 광경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방대원들이 던져 준 밧줄은 조금 짧았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 힘이 빠진 이 남자는 결국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벌건 대낮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몇 시간이나 지켜보는 가운데 한 생명이 어처구니없이 죽어간 것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워낙 충격이 커서 잊히지 않는 광경이었는데 세상을 살아갈수록 이보다 더한 상황도 자주 접하게 되어 이 일은 그만 잊어야할 판이다. 작년 세월호사고가 이보다는 수백 배 더할 것이며 그 이후 우리 사회 돌아가는 꼴은 사고 자체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는 우연찮은 사고에서만 빠져있지 않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는 뜻 모를 구호를 주창할 때 알아봤어야할 일이지만 결국 자기 아버지 과거세탁하려고 역사를 통째로 비틀려하는 대통령에게는 상식이라는 어처구니가 빠져있다. 이 어처구니를 챙겨 비틀어진 맷돌을 바로잡으려는 국민들을 향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적화통일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대통령의 남자’의 막말은 어떤 어처구니로 바로잡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순천대 총장임명사태도 이 정권이 빼버린 어처구니의 하나이다. 후보 2인 중 1인을 골라서 임명할 수 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지만 이 법의 취지를 감안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멀쩡한 맷돌의 어처구니를 빼 버리고는 어디 한번 잘 돌려봐라 메롱 하는 정권의 모습에서 더 이상 분노마저도 일지 않는다.

대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나면 빨리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분한 나머지 거기에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면 다른 일까지 방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빠져 없어진 어처구니는 다시 찾아 제대로 끼워두어야 한다. 곧 새로운 콩을 거둬 맷돌을 갈아야하기 때문이다.

권불십년이라 했지만 그 십년은 다가올 수백 년 역사의 방향을 좌우할 수도 있는 시간이요 세월이다. 지나가기만을 수그리고 기다려서는 새롭게 오는 십년 역시 더 어처구니없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겨우 발목에 차 있는 물살로 오가지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는 20년 전 그 남자처럼 우리는 한줌 독재자의 간교한 권력 횡포 앞에서 어처구니 없어하고 있다. 지금은 빠져 어딘가에 있을 어처구니 부지런히 찾아내자. 찾아서 제대로 끼워 이 역사의 맷돌, 힘차게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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