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와 관련하여)

▲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초임교사 시절의 일이다. 한 아이가 사흘 동안 무단결석을 한 뒤에 학교로 돌아왔다. 왜 결석을 했느냐고 물으니 별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까지 지어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방황 좀 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젊었을 때는 방황도 해볼 필요가 있다고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누나에게는 전화라도 했어야지. 누나가 걱정할 거 생각 못했어?”

당시 그는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녀석은 나의 반격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런 말이 돌아왔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어떻게 방황합니까?”

다시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방황과 타락의 차이가 뭘까? 가끔씩 학생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방황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위험천만(?)한 말을 거두고 대신 선택한 조금은 안전한 버전이랄까? 나는 학생들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해준다.

“방황과 타락의 차이는 탄성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방황은 흔들리다가도 돌아올 수 있는 탄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타락은 아닌 거지요. 고무줄이 늘어나다가 어느 지점에서 툭 끊어지듯이 말이지요. 그럼 원상태를 회복하기가 힘들겠지요?”

그러니까 방황만 하고 타락까지는 가지 말아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영민한 제자들은 얼른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런 교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다시 되돌릴 수 있는 탄성을 잃어버린 학생들도 없지 않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은 퇴행이다.

물론 이런 퇴행은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겪었다. 방황에서 끝나지 않고 타락까지 가버린 부끄러운 기억이 너무도 많다. 나이 탓인지 가끔씩 내 삶을 돌아보게 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왜 나는 그때 그런 행동을 했을까? 수십 번도 넘게 그런 후회와 참회의 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는 동안 나를 구원한 것은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방황과 타락에 이어진 퇴행이 개인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도 그런 부침의 과정을 겪는다. 근대사로만 보아도 우리는 얼른 일제 강점기를 떠올릴 수 있다. 저들의 친일행각은 대표적인 퇴행현상이라 할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끄러움마저 없다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진다. 스스로 갱생의 기회를 놓치는 셈이기도 하거니와 국가적 수치를 후손들이 떠안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도 그 한 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타락한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퇴행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문제는 이것이 역사적 퇴행임을 모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것에는 공과가 있는 법인데 이제 과는 놓아두고 공을 생각하자고 부추기는 무리들도 있다. 역사를 왜곡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을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가?

최근에 신문을 보다가 퇴행이란 단어를 만났다. 세계 최대 교원단체인 국제교원단체총연맹(EI)이 한국 정부에 보낸 긴급 서한에서다. 그 내용의 일부다.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수를 한 가지 종류로 제한하고, 2017년까지 정부의 통제 하에서만 개발하고자하는 귀 정부의 계획에 대해 저희들의 우려를 표명하고자 이 서한을 보내는 바입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전면적 통제는 인권과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 심각한 퇴행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창피한 일이 아닌가. 그래도 창피함을 알아야 그나마 희망이 있다. 하지만 왜곡된 신념을 가진 자에겐 이것이 없다. 이것이 문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엄연한 민주주의의 퇴행임을 국민들이 나서서 천명해야하는 이유다. 오늘날 수렁에 빠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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