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심명선
어린이책시민연대 전 대표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고양이가 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지만,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백 만명의 사람한테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존중 받지 못하고 누군가의 소유물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임금님의 고양이는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고, 뱃사공의 고양이는 바다에 빠져죽고,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는 마술 상자에서 반으로 갈라져 죽고, 할머니의 고양이는 온종일 무릎에 앉아 꼬박꼬박 졸다 늙어 죽었다. 이런 죽음은 각기 다른 삶이 아니라 자존감 없이 누군가의 소유물로 사는 고양이가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의 아이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백만 번 산 고양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의 생각이나 감정을 무시하고 자신이 시키는 것만 하게 하면서 그날이 그날인 채로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를 느끼며 살지 못하는 것은 곧 죽은 목숨과 같다. 특히, 사춘기는 생각의 싹들이 터져나오면서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는 시기인데, 여전히 부모가 시키는대로 살아가야 한다면 아이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내면의 병을 앓게 될 것이다. 고양이 역시, 백만 번이나 자존감이 무너지는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묻지 않는 사람에게 저항할 힘도 잃어버린 채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물건이 되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느 기성사회의 주문품이 되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네는 훌륭한 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독특한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물건처럼 이렇게 만들리라. 이렇게 시키리라 하는 부모나, 지금의 사회의 필요에 맞는 기계를 만들리라 하여 그 일정한 판에 찍어내려는 지금의 학교교육과 같은 것 잘못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코 우리는 이것이 옳은 것이니 받으라고 무리로 강제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요구하는 것을 주고 저희에게서 싹트는 것을 북돋아 줄 뿐이고 보호해줄 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네에 대하는 태도는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항상 새 세상의 창조가 있을 것입니다.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 운동과 사상』 중에서

 한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로 살았다.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었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많은 암고양이들이 있었지만, 백만 번이나 죽어 본 경험을 뻐기며 그 누구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자기 자신만을 좋아했다. 그런데 딱 한 마리, 고양이를 본 척도 하지 않는 새하얗고 예쁜 고양이가 있었다. 하얀 고양이에게 자신이 얼마나 재주가 많은지, 백만 번이나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 과시하지만 하얀 고양이는 “그래.”라고 대답할 뿐이다. 자신을 가장 좋아한 고양이는 은근히 화가 난다. 고양이는 누군가와 관계 맺는 일이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얀 고양이가 고양이의 자랑을 그냥 들어주기만 할 뿐 고양이의 소유물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때, 고양이는 자신이 익숙해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고양이 자신이 자기를 소유했던 사람들의 권위나 힘에 눌려 당연하게 살았던 삶과 누군가를 소유할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난 백만 번이나......”가 아니라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으응”으로 고양이는 마침내 하얀 고양이 옆에서 질문하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을 갖고 하얀 고양이를 알아가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울다가 어느 날 낮에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백만 번의 삶에서 한 번도 스스로의 삶을 살지 못했던 고양이는 온전히 자신으로 살아가게 되면서 하얀 고양이를 만났고,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면서 자존감을 갖게 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자신만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고양이의 깊은 슬픔 속에서 백만 번이나 살았던 어떠한 삶보다 의미있는 그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