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호

 
봄 새싹 눈 뜰 때, 얼마나 경이로운가.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봄에 사람들은 희망을 전하며, 그리운 사람에게 안부를 건넨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겨울 매서운 추위를 뚫고 올라오는 새 움이기에 더욱 뜨거운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순천시민들의 광장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는 소문을 들은 지 몇 달. 드디어 희망의 싹이 돋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며 나의 일 인양 마냥 기쁘고 설렌다.

예로부터 우리들에게 마당은 숨통 트이는 공간이다. 답답한 오두막에서 벗어나 사람으로 활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유년의 뜨락이 집집 마당이다. 그래서 몽테뉴의 수상록에는‘사람은 움직이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또 동네 광장에서 이웃과 어른을 만나고 사회를 배우기 시작했다.

①여성의 마당은 동네 우물이었다. 가족의 생명수를 떠오는 샘터는 마실 물 외에도 아낙들의 광장이었다. 삼삼오오 빨래를 하며 온 동네 소문과 정보를 두루 나르는 공간이기도 했다. 소통의 광장은 동네사람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 공간인 셈이다.

②광장에서 형성되는 크고 작은 소식과 안부와 각종 경조는 마침내 마을 원로회의에 부쳐지고 신중한 논의와 의결을 거쳐 마을 회의에서 판결이 내려진다. 이 때 판결에 아무도 토달지 않은 것은 가장 합당한 결정이라고 모두가 수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 없다는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공론화의 장이 없다는 불평과 다름없다.

이제 우리 고장에‘광장신문’이 태어났다. 봄 새싹처럼 반갑고 환영한다.‘순천광장’에서 만나고 싶은 이야기들의 몇 가지 그림을 미리 그려 보고 싶다.

첫째,‘광장신문’은 우리 모두의 신문고였음 좋겠다. 누구나 제약 없이 북을 울리는 신문고는 광장 한가운데 있어야한다. 광장 신문고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지역 신문들이 얼굴을 내밀다 사라져버린 이유는 주인이 시민이 아니었음을 잊지 말자. 주인에게 주권이 있는 척 했을 뿐, 주인에게 권한을 주지 않은 탓이다. 그러므로‘광장신문’은 협동조합회원의 것이 아니며 조합원의 마당도 아님을 분명히 인지해야한다. 시민과 독자가 신문의 주인일 때 신문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둘째,‘광장신문’은 비난을 위한 비판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억울한 사람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악습을 반복하지 않아야 오래 살 수 있다. 시궁창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은 장엄하도록 아름답다. 비난 아닌 건전한 비판은 재창조의 큰 뜻이 있는 바, 비판의 목적이 죽음의 그늘이 아니라 상생의 뜨락이 되기를 바란다.
숲에 키 큰 나무가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키 작은 나무들의 살랑거림이 바람을 만들고 그 흔들림으로 우리는 서늘한 바람을 맞는다.

셋째는 재미있는 광장을 만들어 주기를 감히 청한다. 문화는 정신을 치유하고 말갛게 걸러내는 장치다. 문화는 감동으로 아픔과 슬픔을 다독이며 화해와 용서로 적을 껴안는다.

③최근 우리 사회는 인문학의 부재를 한탄하고 있다. 다행히 인문학 붐이 일고 있고 우리고장에서도 청소년들에게 확산되고 있다.‘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공부’혹은‘교양인의 공부’가 인문학일진데,‘광장신문’이‘길 위의 인문학’의 안내자가 되길 자청하라. 그러면 독자들에게 기다려지는 신문이 될 것이다.

‘순천광장신문’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책 한권을 읽으면, 푸짐한 식탁에서 포만감을 느끼는 행복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듯하다. 신문을 읽고 행복해하는 독자들의 표정을 기대한다. 우리고장에서 사명감을 안고 출발하는 신문창간에 우리 모두의 염원이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장윤호
문학박사. 시인. 인문학교수, 순천교육공동체시민회의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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