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나이를 먹으면서 언젠가부터 ‘시간’은 ‘늙음’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나를 따라 다녔다. 나는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고 불편했다. ‘시간’이라는 관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내 남은 생에 온전한 평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에 골몰해 있을 때 불현듯 오래 전 읽었던 헷세의 소설 『싯타르타』가 생각났다.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시간’과 관련된 무엇인가 소설의 말미를 장식했던 것 같았다.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내가 찾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거였다.

소설 속의 싯타르타는 집을 떠나 스승을 찾아 구도행을 하다 세속에 들어 돈도 벌고 여인을 만나 사랑도 하고 아들도 얻게 되나 다시 떠돌다 마지막으로 니란자 강가에 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난다. 끊임없이 흐르는 세월과 같은 니란자 강이 삶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면 뱃사공 바수데바는 그 강을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각자(覺者)인데 시타르타는 강에서 그와 함께 보내며 깨달음을 얻는다. 강을 바라보고 강의 깊은 소리를 들으며 시간의 관념을 극복하고서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마지막 대목이 주는 깊은 울림과 함께 소설에 대한 독후감으로 아래의 시 한편을 썼다. 

니란자 강의 숨소리가 들렸다. 
만트라 같은 중저음의 깊은 소리에는 
우주의 지능이 담겨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숨소리를 따라 흐르며 
강의 가장 중요한 비밀인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밀어密語를 들을 수 있었다.

상류의 폭포에도 하류의 나루터에도 바다에도 
강은 동시에 흐르며 하나로 현존하고 있었다. 
강은 끊임없이 흐르는 변화의 세월을
언제나 현재로 산다하니 
나를 흐르는 몸의 세월도 
한 생을 통으로 동시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늙음도 없었다.
촌각의 세월도 없이 지금 여기를 흐르는
강이 있을 뿐이었다.

니란자 강의 숨소리는
변화 속에는 변화를 초월한 실재가 있으며
내가 그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실재를 거저 준다 해도
나는 세상과 세월의 변화를 장악할 수 있을까.
몸 안의 세포에 내장되어 온
수백만 년의 지능을 읽어낼 수 있을까.
과연 나만의 옷을 벗고, 나만의 생각도 버리고
그렇게 만날 수 있는 나는 누구일까.
이중에도 니란자 강가의 숨소리는 계속 들렸다.  
  (「니란자 강가의 숨소리」 전문)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시간의 집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몸’을 떠나 현존할 수 없으니 나에게 시간은 결코 관념이 아니며 골수에 박혀있는 존재의 한 부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몸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 몸을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명상 의학자 디펙초프라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에게 몸은 새로운 세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뿐이지 노화라는 개념은 없었다.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6주마다, 골격은 3개월마다 새롭게 바뀌어 한 해가 지나면 우리 몸 속 원자의 98%가 새 것으로 교체된다. 흐르는 강처럼 몸은 육안으로는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실은 항상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디펙초프라의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 크게 고무되었으며 그러하기에 ‘현존’이라는 개념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은 낡은 세포는 버려지고 늘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그것으로 현존한다. 살아 있는 현재가 생명 자체이고 전부이다. 이 전의 죽어버린 세포나 앞으로 생겨날 세포는 ‘몸’이 아니듯이, 말하자면 생명존재의 개념에서 보면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원래 없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 같은 시간은 만들어낸 관념이며 습(習)일 뿐이다. 신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여길 뿐이다. 그래서 강의 비밀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상류의 폭포에도 하류의 나루터에도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인생은 하나의 강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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