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승완
순천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그동안 순천 도심의 변화를 주제로 글을 썼는데, 이제 순천과 인접한 벌교와 광양, 여수의 도시변화 과정과 성곽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필자가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이나 ‘한국도시설계학회’에 발표했던 글을 간추린 것으로 첫 번 째로 벌교이야기이다.

현재 벌교는 보성군에 속한 ‘읍’으로 행정 구역상 가장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소설 ‘태백산맥’에 많이 소개되고 있어 소설 속 시점인 1948년 이전에는 벌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벌교는 백여 년 전인 1908년까지는 현재 순천의 ‘낙안읍성’을 읍치로 둔 낙안군의 장시 가운데 한 곳이었다. 벌교가 강이나 연해 등의 수로 또는 해로 교통로의 요지인 포구에서 지역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농촌에서 곤란을 겪던 농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을 상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즉 벌교가 지금과 같이 지역의 거점으로 형성된 계기는 벌교천의 교량인 홍교에 인접해 웃장으로 불리던 벌교장(또는 단교장)과 선기교(선근다리) 인근의 아랫장으로 불리던 장좌장 덕이었고, 그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 1948년 당시의 벌교읍 항공사진(출처: 국토지리정보원)

벌교의 도시 발전 상황을 살펴보려면 일제강점기인 1930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 볼 수 있다. 1930년 이전에는 단순한 교통 중심지와 해륙 물산의 집산지인 지역의 거점에서 도시로의 행정체계와 그 경역이 정비된 시기이다. 1913년 4월에 고상과 고하 2개 면을 합하고 고읍면과 남상면을 합쳐서 남면이라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남면을 폐합하여 그 사무소를 벌교리에 설치하고 1915년 벌교면으로 개칭하였다. 1929년에는 순천군 동초면의 5개 리를 벌교에 편입시켜 현재의 벌교읍의 물리적 경역을 설정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벌교의 간선 도로망은 목포와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남쪽 고흥으로 분기되는 ‘T’형 도로망에서 북에서 내려오는 화순선의 개통으로 ‘  ’형 도로 체계로 정비된다.

▲ 현재 지형도에 표기한 1915년 당시의 벌교읍 주거지역과 당시 하천의 일부.

1930년 12월 광주-여수 간 철도가 벌교를 경유하게 되면서 하천변에 점적으로 돌출되면서 확산되던 시가지를 일시에 확산시켰다. 즉 서쪽의 산악 연접지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벌교천은 도시 형성의 계기가 되었지만 도시 확산의 한계선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철도 부설을 기회 삼아 홍교를 지나면서 굴곡이 진 벌교천의 선형을 바로잡는 직강공사를 하여 도시 확산을 유연하게 하는 매립지를 대규모로 확보한다.

벌교 도시 형성의 한 축이었던 장좌장은 벌교천의 직강공사 전에는 접근성이 유리했지만, 벌교천의 선형 변경으로 지형의 상대적 우위를 잃게 된다. 이때 중도농장의 주인이었던 나카지마 타츠 사부로(中島辰三郎)가 사장됐던 매립 면허를 부활하면서 목적을 당초 갈대밭 조성에서 논(답) 조성으로 변경해 현재 ‘중도방죽’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간척지가 조성된다.

벌교천의 정비로 도시 기반시설이 보완되거나 신설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경전선 철교 인근의 물량장과 부용교(소화다리)이다. 철교의 물량장은 홍교 인근의 자연 지형지물을 이용하던 것이 옮겨진 것이고 부용교는 우기 때 불완전했던 홍교의 기능을 전천후로 대체한다. 사립 송명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되고, 벌교공립보통학교가 2만 6000평의 신시가지 조성을 계기로 이전한다. 그리고 1937년 도시의 물리적 확산에 힘입어 도시화를 상징하는 ‘읍’으로 승격된다. 당시 ‘읍’은 ‘지정면’ 제도를 대체한 것이고, 지정면의 전제된 조건 중의 하나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여 그 상황이 당시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부(府)에 가까운 곳이다. 또한 1940년까지 연차 계획으로 상수도 부설, 시가지 하수공사, 화장장 정비. 공설시장, 대포선 도로 개설 등의 도시 기반기설이 추가로 계획되면서 현재 벌교의 기본 골격이 형성된다.   
 
▲ 일제강점기 벌교의 시기별 도로망 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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