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형배
광양시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경제전망에 대한 걱정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청년세대를 일컬어 3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세대니, 5포(3포 + 집, 직장)세대니, 7포(5포 + 꿈과 희망)세대라고도 표현한단다. 정치가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를 풀어가는 활동이라면, 정치의 실종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신영복 교수의 ‘담론’이라는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BC.551~BC.479)와 제자 자공이 나눈 대화이다. 자공이 “정치가 무엇인지” 묻자, 공자가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이고, 버려야 할 것의 순서로 병(兵)-식(食)-신(信)”이라 답한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이라는 것이다.

공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 속에 현실에서는 실패한 정치가로, 68세의 노인이 되어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와 향리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일로 73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사후에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4년 동안의 망명과 유랑이 공자를 혁명가에서 만세의 목탁으로 바꿔 놓은 일대사변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공자의 유가사상을 보수적 사고로 분류하는 견해도 있다. 1960년대 말 중국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장칭, 왕흥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공자를 반동 수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 중국의 세계화 아이콘으로 평가 받고 있다.

공자와 비교해 관중(BC.725~BC.645)의 정치관은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는 관중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신(信)-병(兵)-식(食)이라 답했을 것이라 말한다. 식(食)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창고가 가득차야 예의염치를 안다고 했던 관중의 정치관에 대해 설명한다. 관중의 정치관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 중 법가의 효시로 회자된다.

관중은 행정과 군사편제를 결합시켜 부국강병에 성공했고, 관중의 개혁 덕분에 제 환공은 춘추시대 첫 ‘패자(覇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관중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 되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도 유명한 관중(管仲)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지만 특히 경제를 중시했다. 그는 먼저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필선부민(必先富民)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예의염치를 아는 부국강병의 문화대국을 건설하는 이상을 가졌다. 사마천의 표현을 따르자면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 의미겠다. 즉 예의염치는 재화에 여유가 있을 때 생기고  없으면 사라진다,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도덕도 행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졌기에 관중이 상가(商家)의 시조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자와 관중의 시간적 차이가 약 200년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차이를 따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정치의 본질이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삶을 편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라는 데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과 의를 중시했던 공자나 경제를 중시했던 관중이나 사람이 예의염치를 지키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꿈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경험한 것 중에서 보다 나은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계속되는 불황 속에 국민이 예의염치를 지킬 수 있도록 국가와 정치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부민에 있음을 잊지 말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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