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수난의 내력

 

 

아내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 셋이다. 마흔 셋에 아이를 낳다가 극심한 하혈로 죽을 뻔했다. 노산이라 병원에서 낳아야한다는 의사의 타이름이 있었지만, 그땐 하도 가난한 나머지 돈 한 푼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 서투른 동네 산파에게 맡긴 게 화근이었다. 빈민촌이라 어느 기관에서 파견한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이가 자리를 비웠다면 아내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응급조치를 잘해준 게 아내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죽다가 살아났으니, 죽을 고생’을 한 셈이다.

그 무렵 우리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다. 쌀밥은 생각지도 못했다. 매끼 옥수수가루 죽이나 밀가루부침이 고작이었다. 반찬은 들나물이나 밭에서 주워온 무·배추시래기 된장국이면 성찬이었다. 산모를 먹이려고 친척집에 쌀을 얻으러갔다가 퇴짜를 맞은 적도 있다. 어느 친구가 사과 한 알을 주기에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어, 집으로 가져와 산모에게 먹였다.“그 때 그 사과는 잊을 수가 없어요. 맛도 맛이지만, 당신의 배려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보였지요.” 아내는 그때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몸을 풀자 밤 1~2시까지 실을 잇는 일을 했고 그 품삯으로 연탄 두세 장을 살 수 있었다. 하루 두 장이 들어가는데, 공기조절을 잘해서 한 장으로 사흘을 버텼다. 내가 입이라도 덜려고 겨울방랑을 떠나자, 삯바느질로 연명했다. 내 생애 최악의 시기였다.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하여 대학에서 쫓겨났고, 아르바이트로 겨우 살림을 꾸려갔다. 아내는 난생 처음으로 가난의 고통을 겪은 셈이다. 본디 밥은 먹고 사는 집안이어서 죽이란 것을 모르고 자랐다. 아내는 일제강점기 말이나 해방 뒤에 겪은 지독한 흉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까진 배고파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1965부터 1973년에까지 결핵요양소‘한산촌’에서 살림을 맡아 할 적에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로 가서 시장을 봐다가 결핵환우들의 밥을 지어주던 일, 땅을 개간해서 김장거리와 수박, 고추 따위를 가꾸는 일, 병동 사이에 길을 내던 일, 환우들의 보신을 위해 닭을 치던 일, 구제품을 뜯어 환우들의 이불을 만드는 일 따위, 40대 젊은 여성이 화장 한번 하지 않고 지냈던 나날들, 그리고 불이 들지 않는 흙벽돌집 온돌방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던 일 등등. 그러기를 10년 가까이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디 일을 해보지 않고 살았던 터라, 그 고생은 더욱 힘겨웠을 터이다. 어린 아이가 결핵환우의 칫솔을 물고 다니는 것을 본 어머니로서 그 마음은 오직했으랴.

그 뒤에 내가 요양소를 접고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보따리장사’를 할 적에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느라‘가난의 고통’을 또 겪어야 했다. 대학강사란 게 석 달 벌어서 여섯 달을 먹고 살아야 한다. 내가 대학교수가 되면서 비로소 뒤늦게야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 가난의 고통을 덜 수 있었다. 몸은 본디 건강한 편이라 병원신세는 별로 지지 않았다.

일흔 다섯을 넘기자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걷기가 불편해졌다.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뼈를 어린이 것으로 바꾸기 전에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걷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여든 여섯을 넘기자, 걷기가 힘들어졌다. 허리에 디스크가 왔단다. 그래도 내가 부축하면 웬만한 데는 다닐 수 있었다. 나는 함께 슈퍼마켓도 갔고, 교회도 데려다주었다. 손을 잡고 다니니까, 다들‘잉꼬부부’라 했다.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그 동안 틀니도 하고 보청기도 마련했다. 먹는 데나 듣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송기득
전 목원대 교수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