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1 - 강수련(93세)

20년 타향살이 설움을 딛고

1921년 순천 매곡동에서 태어난 강수련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본으로 돈벌러간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국민학교 마치고 엿장사도 하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넝마장사를 했어요. 이집 저집 고물을 사서 도매상에 팔고, 지금 우리나라 쓰레기장 같은 곳에 가서 땅을 파 뒤져 구리나 고철을 수집해서 팔았다”고 회상한다.

▲ 자서전을 살펴보는 강수련 어르신
“거기서 제가 4학년 때부터 우등생이 돼 가지고 고등과 일학년 때는 급장도 하고, 고등과 2학년 말기에 철도시험도 어려웠는데 합격했어요. 우리학교 졸업반 중에서 세 명이 합격했다고 교장선생님께서 조회시간에 근래에 없는 경사이다”라고 자랑스레 말한 것이 생각난다. 유난히 총명하고 성실한 성격탓에 일본 국민학교(8년제로 7,8년 학생은 고등과생이라 함.) 고등과 시절에는 급장으로 학생회 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주위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여러분과 환경이 다른 조선사람이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일곱의 나이로 동경철도국 직원 신규채용 시험에 합격해 철도에 입사하게 된 그는 기관차 청소하는 고내수로 발령을 받아 증기기관차 불을 때는 역할을 하는 기관조사를 거쳐 기관사가 된다. 스물네살에는 일본철도 근무 7년만에 판임관(우리나라 3급 사무관)이 되어 제모와 제복을 입고 금색 판임관 마크를 달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오로지 성실하게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동경철도국에서 주최했던 투탄경기(증기기관차에 불을 때기 위해 석탄을 정확하게 던지는 경기)대회를 했는데 전국 28개 기관차사무소에서 선출된 80여명의 선수 중에서 2등을 차지해서 축하환영회도 받고 그랬제”라며 당시를 회상하며 새로운 직급에 발령을 받아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여러분과 환경이 다른 조선사람이다”라고 뚜렷이 국적을 밝혔다고 한다.
 

‘요것이 천직이다’해서 열심히 일한 거 밖에 없어

“20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찾아온 고향인디 집도 땅도 없어 막막하제. 부모님 모시고 6남매의 장남으로 생계는 책임져야 하제. 오랜 일본생활로 ‘한국말을 잘 못하는 한국사람’이 되고 말았제.”

해방 후 귀국선을 타고 1946년 1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순천지방철도국으로 찾아가 일본철도국의 추천서와 이력서를 내미니 철도고급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다음날부터 바로 순천기관차사무소에 출근하게 된다. 그렇게 한국철도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82년 퇴직할 때까지 오로지 철도안전과 가정을 위해 성실하게 일만 했다고 한다.

“요것이 천직이다 해서 열심히 일한 거밖에 없어. 기관조사, 기관사, 1968년 3급시험에 합격해 부산기관차사무소 운전계장, 광주기관차사무소 소장, 천안기관차사무소 소장을 거쳐 1982년 순천지방철도청 과장직으로 퇴직할 때까지 일요일에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어.”

‘우리가 물러간 철도는 바로 끝장이 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일본인에게 우리 철도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일했다는 그의 집에 가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벽면에 퇴직당시 받은 대통령 녹조훈장이 걸려있다.
 

혼란기에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버렸제

▲ 철도퇴직자들의 모임인 철우회 사무실 앞에서
“철도관사입구(지금의 철도노조)에 있는 철도경찰대 본부도 빨치산의 습격을 받을 때도 있었고, 반란군 치하에 있을 때 본의 아닌 감투를 쓰게 되어 소위 사상자로 몰려 20년형을 받아 형무소 신세가 된 동료들도 많았다”며 “혼란기에 나도 살기 위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총을 가지고 있는 반란군이나 진압군을 피해 다녀야 했다”고 1948년 여순사건 당시를 회상한다.

어느 날은 일을 마치고 밤 10시경 골목길에 떨어져 있는 하얀 뭉치를 주웠더니 ‘삐라’였다. 당시 휴지가 귀할 때라 변소용 휴지로 사용하려고 삐라뭉치를 더 주어드는 순간 갑자기 “손들어”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총을 들이대는 철도경찰대원에게 붙잡혔다. 손에 쥐고 있는 삐라를 증거물로 철도경찰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고역을 치러야 했던 기억도 있다.

“1951년 4월 어느 날인가 순천역을 출발해 구례구역을 지나가는 비료수송열차에 탑승했제. 구례구역을 지나 압록역을 통과한 2분쯤 지나 요란한 총소리가 났어. 열차피습으로 기관차의 기관사가 어깨에 총을 맞았고 기관조사는 가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 사고가 나기 바로 전 구례구역까지 그가 서서 왔던 자리가 총을 맞고 즉사한 기관조사의 자리였던 것이다. ‘왜 구례구역에서 자리를 옮기고 싶었을까? 만일 그대로 기관차에 타고 있었다면 꽃다운 나이에 쓰러져 갔던 저 젊은 철도인처럼 순직했을 것인데···’ 그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아올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내 조그마한 사연이 후손들에게 보탬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강수련이가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헐 사람 없을 거이요. 철도 댕긴 사람한테 나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알아요. 그거 하나가 자랑입니다.”

▲ 강수련 어르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모아놓은 자료들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평상시에는 철우회 사무실에서 바둑을 두는 그의 취미는 글을 쓰는 일이다. 기관차 관련 책자를 몇 권이나 펴냈으며 철도직원들이 읽는 철도지에도 수필 등을 써오고 있다. 특히 1992년 그의 나이 72세 때는 200쪽 분량의 ‘자서전’을 직접 쓰기도 했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그의 집에는 ‘나의 발자취’라는 이름의 사물함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온갖 기록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그의 자서전 앞부분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역사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 시대에 흐르고, 이 시대는 또 미래의 시대에 그 많은 사연을 어김없이 전해 줄 것이다. 나도 이 시대의 한 사람으로써, 내가 겪었던 조그마한 사연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인가 보탬이 될까 하여 이글을 한자 한자 정성들여 자필로 써 본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속에서 철도의 역사를 근현대사의 아픔을 철도관사마을의 역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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