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멀리 사는 친구가 내심 정원박람회에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마디로 ‘올 데 못 된다’고 했다. 뙤약볕 아래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했지만, 큰 기대를 품고 왔다가 허탈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멀리 사는 친구들에게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 같은 곳들이다. 천 년의 세월이 묻어 있고, 우리의 옛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런 문화유산은 몇 조원을 들여도 만들 수 없다. 돈으로 건물을 세우고 정원을 꾸밀 수는 있지만, 옛 이야기와 세월의 흔적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오래되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런 칭송을 바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여기서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선암사로 가는 흙길에는 40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향수가 묻어 있고, 송광사의 범종 소리에는 천 년 묵은 고뇌가 서려 있다. 온갖 기기와 잡소리들로 가득 찬 속세를 떠나 잠시나마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지성소(至誠所)와 같은 곳이다.

사람이 무엇인지 알려면 광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적이 없는 광야까지 가서 현재의 찌든 기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선암사의 흙길과 숲이 있고, 송광사의 범종과 예불 소리를 지척에 가지고 있는 우리는 멀리 광야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선암사, 송광사가 천 리 길 여행객을 끄는 것은 우리의 참모습을 대면케 해주는 광야와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암사를 리모델링을 하겠다고 한다. 그것도 생태적으로다가 말이다. 선암사 흙길을 친환경소재로 포장을 하고, 차(茶) 체험관 옆으로는 자동차가 마음 놓고 쌩쌩 다닐 수 있도록 번듯한 도로를 개설할 계획이란다. 5년에 걸쳐서 52억 원을 들이겠다는 것을 보니, 대대적인 변신을 꿈꾸고 있는가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발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선암사 승선교와 뒷간 구경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일까?

예전에 나는 선암사 흙길을 거의 매주 찾았었다. 매표소 옆에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오른다. 비오는 날, 비에 젖은 흙이 맨발에 닿는 감촉은 감미롭기 그지없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그러다가 더 이상 떠오를 것이 없으면 이윽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른다. 옆에 있는 계곡으로 처박히지나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로... 가끔 어린애들한테서 위로의 말씀도 듣게 된다. “저 아저씨, 집에서 쫒겨 났나봐” “아저씨, 발 안 시려워요?” 참 사삭스럽기도 하지, 이런 별 것도 아닌 것에 가슴에 얹혀있는 것들이 쏴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거기에 ‘선암사까지 남은 거리 몇 km’ 이런 표지판이 줄 지어 있고, ‘자연을 보호하자’느니 ‘치유의 숲’이니, ‘만남의 숲’이니 하는 요사스런 팻말들이 붙어 있었다면 무아지경은 고사하고 기분부터 잡쳤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선암사의 매력은 이런 잡것들이 없다는 데 있다. 매표소를 지나는 순간, 인공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가르치려는 것도 없고 보여주려는 것도 없다. 아무 설명이 없는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우리는 태어난 곳에 그대로 살고 있지만, 기실 그곳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책상에 앉았다 하면 인터넷 검색질을 해대고, 눈이 벌개지도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혹시 문자가 왔나 확인해보고, 휴일에는 제 삶터에서 되도록 멀리 강박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뭔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채우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잃어버린 것은 필시 고향(故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계 속에 고향은 없다.

나는 선암사 흙길에서 고향 길을 보고, 밟고, 향기를 맡는다. 그런 선암사를 품격 높은 문화관광자원으로 꾸민다고 하니 가슴이 턱 막힐 것만 같다. 한 번 잃어버리고 나면 비교 대상조차 없어지고, 새로 생겨난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이런 식으로 수만 가지 소중한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선암사의 태곳적 흙길마저 첨단 생태도로에 밀려나려는가보다. 선암사가 태고종(太古宗)의 종찰임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 태고의 숲길에 손대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윤철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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