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 시인
출근하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아내가 베란다 쪽에서 마늘을 까고 있었다. 왜 아침부터 힘들게 마늘을 까느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에 들여놓은 통마늘을 까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벌써 상한 것이 몇 개 보인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출근시간까지 삼십 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짧은 갈등의 순간이 있었지만, 내년이면 육십 줄에 들어서는 아내의 연약한 손에 비해 통마늘이 너무 강인해보였다. 만약 내가 가세한다면 전세는 금방 뒤집어지리라. 결국 나는 아내 옆에 쪼그려 앉았고, 나의 빠르고 완력 있는 손놀림에 난공불락의 성처럼 쌓여 있던 통마늘은 마늘 위에 마늘 하나 남지 않고 삽시간에 정리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한 가정에서 일어난 별 영향가도 없는 이야기를 서두에 늘어놓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아내를 잠깐 도와준 일을 가지고 가정 민주주의의 한 사례로 윤색하려는 건 아니다. 하긴 굳이 갖다 붙이기로 한다면 하나의 범례가 될 법도 하다. 평소 집안에서 남편인 나의 권력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면 출근을 하려다 말고 아내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오늘 아내를 도와준 일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것이 민주의의의 실천이든 사랑의 실천이든 나의 행위가 아내에게 기쁨과 유익을 준 까닭이었다. 잠깐 망설임의 순간은 있었지만 끝은 좋았다. 아내의 살가운 배웅을 받으며 집에서 나와 걸어서 십 분 거리인 학교에 당도하기까지 내내 달뜬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디쯤에선가 생각이 많아졌다.

인생이 이런 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조금 양보해서 누군가 기쁨을 얻고, 결과적으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나 슬프게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이런 방식이 아닐 때가 많다. 통제와 관리가 능사인 학교에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서는 무능교사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교사의 인격적인 지도를 낯설어하거나 불편해한다는 데 있다. 학생들에게 자유를 허한 대가로 다른 이도 아닌 학생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면 말이다.
학교는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병영과 흡사하다. 병영에서의 삶은 자기 삶이 아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거나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긴 요즘 군대는 과거처럼 “까라면 까는” 그런 식은 아닌 것도 같다. 학교는 어떤가?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는 ‘강제야간자율학습’이란 용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자율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학습을 강제로 한다는 말이니 형용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한다. 이러니 민주시민 양성이 주된 과업 중 하나인 학교가 군대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욱, 나는 학교에서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불합리한 사회를 불합리하게 사는 것은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꿈꾼다는 말 속에는 녹록치 않은 실천의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학생들은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는 없는 것을. 담임으로서 내가 가진 권력을 포기하고, 대신 학생들에게 자유를 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다행히도 그런 일이 괴롭지만은 않다. 고난이 고난으로만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오늘 아침 나를 배웅하면서 보여주던 아내의 눈빛을 아이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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