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비노바 바베는 인도의 ‘부단운동’을 이끌면서 부자들이 땅을 헌납할 때, 자신의 명예를 앞세우는 허영 된 마음이나, 또는 권력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땅을 내놓는다는 기미가 조금만 있어도 그것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인가 준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초기 불교사회에서는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스님들이 반드시 하루 한차례의 탁발을 하여 먹는 것을 해결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시간이 되면 잘 사는 자나 못사는 자나 모두 나와 적선을 했다고 한다. 이런 탁발 행위는 얻어먹는다는 개념보다 사람들에게 적선을 하게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적선, 그러니까 누구에게 무엇인가 준다는 것은 물질적인 문제보다는 스스로의 선한 마음을 일궈내는 것에 더 무게가 실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적선하는 것은 내 안의 선한 마음을 알고, 또 그것을 쌓아가는 하나의 수행이다.
 
그처럼 주는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 모범 답안을 비노바 바베의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다. 비노바 바베의 집에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거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그에게 적선을 베풀자 비노바는 저렇게 멀쩡한 사람에게 적선을 하는 것은 게으름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선은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존중해주고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어머니는 매일하는 식사기도에서도 늘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니 그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성자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저런 성금들이 많다. 참으로 고맙고 거룩한 사회적 실천들이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세금 때문에,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나 이름을 내려고, 또는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그런 적선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좋은 일이지만 정말 온 마음을 실어 스스로의 선을 일구기 위해 하는 ‘적선’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주는 행위가 손해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매일 지하철 입구를 오르내리며 보게 되는 구걸하는 사람이 나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동전을 놓고 올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아니 1년에 한번이라도 나를 위해서, 나의 선한 마음의 회복을 위해서 적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적선’은 많이 가진 자가 아니더라도 아니, 아예 가진 게 없는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본질적으로 물질이나 돈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안에 선함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고, 또 그 마음을 일궈내는 하나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