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개학 날 점심시간에 한 아이가 찾아왔다. 교과서를 빌려줄 수 없냐고 했다. 다행히 여분의 책이 한 권 있었다. 책을 건네며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3학년이라고 했다.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반은 아니었다. 인연이 비껴간 것이 조금은 아쉬웠을까? 잠깐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 책 너 가져. 난 내년이면 이 학교에 없어.” 
“아니 왜요?”
“응 그렇게 됐어. 나이가.”

아이는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무슨 말을 써줄까 잠깐 고민하다가‘사랑하는’이란 글자를 먼저 쓴 뒤에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얼른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고, 나는 아이의 이름 아래 짤막한 덕담을 곁들인 뒤에 다시 책을 건넸다. 책을 받아들고 상기된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아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중에 부도수표처럼 남발되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인연이 비껴간 터라 그럴 기회도 없을 텐데 왜 아이는 교사의 입에서 공수표처럼 남발된 사랑이란 말에 신이 난 것일까? 

나는 해마다 담임을 맡은 아이들에게 생일시를 써주곤 했다. 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았지만 마지막 제자들에게 생일시를 써주고 싶었다. 수업시간에 그런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오늘과 내일 중에 “생일시 받고 싶어요”, “선생님과 사귀고 싶어요”등의 문자를 보내는 친구에게 생일시를 써주겠노라고. 대신 가끔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생일을 앞두고는 보름 이상 편지나 문자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 했는데도 상당수가 친구 신청을 했다. 첫 단체 문자를 이렇게 보냈다.  

 “안녕! 난 안 마담이라고 해.‘마음의 담임’을 줄여서 마담이야. 거기에 성을 붙여서 안 마담! 나의 마지막 제자가 되어주어 너무 기쁘고, 너희들도 축하해. 오늘의 질문은 난 어떤 내가 되고 싶은가? 장래 희망이나 직업 말고 그냥 나라는 인간 말이지. 혹시 아직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 지금 생각해보지 않을래? 이것이 첫 번째 미션이야”

그 후 불과 두 시간 남짓, 나와 아이들 사이에 단편 소설 한두 권 분량의 문자가 오고갔다. 그중 3월에 생일이 든 아이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저는 60억 명의 제가 되고 싶어요.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어요. 예를 들어 제가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인 것처럼 누군가의 첫 스승 누군가의 마지막 스승이 되고 싶어요.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60억 이라는 전 세계인에게 제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어린 제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어느 분야에서든 이름을 알리는 세상 모든 사람 기억에 남는 제가 되고 싶어요”

  “와 우리 ○○이 꿈이 엄청나구나. 너의 꿈에 비하면 내 꿈은 너무 작은 것 같구나. 내 꿈은 반평생 함께 살아온 아내, 더 이상 마음고생 안 시키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잘 지내다가 같은 날이나 하루 이틀 사이로 죽어서 같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거든. 우습지? 그리고 정년이 딱 일 년 남았는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학교를 떠나는 것이 내 꿈이거든. 내 꿈이 너무 작지?”

“아니요. 저는 절대 작지 않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꿈을 듣고 나니까 제 꿈을 이루려면 제 주위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많이 신경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제 주위 사람들부터 챙겨야겠어요”

“훌륭한 생각이구나. 그래도 너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구나. 다만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네가 네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구나. 오늘 너랑 이런 대화를 나누어 무척 행복하구나. 내일 보자”

나는 내년 2월이면 학교를 떠난다. 남은 1년을 무엇으로 채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의 진실을 키워주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일. 이 험한 세상에 과연 진실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험한 세상이라 더 진실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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