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준
소설가, 논설위원장
미국 대사가 칼에 찔렸다. 피의자가 한 때는 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 한다. 한국사회에서 대학 강의까지 했던 사람이라면 어쨌거나, 지식인 계층에 속한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회적 공분으로 해서 미국 대사에게 흉기로 상처를 입혔는지는 언론을 통해 그 속내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 미국 대사는 어느 만큼 치유가 이뤄졌고,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우리말 속담까지 곁들이며 퇴원하기에 이르렀다.

오랜 전통적 관계 속에 있는 나라에서 한 시절의 지식인으로부터 일국의 대사가 대낮에 칼에 찔린 사건은 아무려나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를 험악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제재여서 불행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대사의 쾌유를 비는 우리 국민의 애틋한 정감을 느낄 수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행위 가운데에 보여주어서는 아니 되는, 보아서는 아니 되는 쾌유 기원 구호나 행사가 벌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참 볼썽사나웠다.  

들어본 지 오래인 어느 정당의 대표라고 하는 자가 ‘석고대죄’의 ‘단식’이란 구호를 내걸고 한 행위는 차라리 미숙한 정치 행보라 볼 수 있는 까닭에 별나고 머쓱하게 여기면서 어리석다, 치부할 수 있겠다. 모 기독교 단체의 나이 지긋한 분들께서 부채춤을 추고, 난타 공연을 하고, 발레까지 곁들였다는 쾌유 기원 문화제는 민망함을 넘어 메스껍다. 어느 방송에 출연한 이는 미국 대사에게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사용하길 바란다며 ‘이복덕(李福德)’이라는 참으로 만복이 깃든 한국식 이름까지 지어줬다는 전언은 귀를 닫고 싶은 심경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뉴욕타임즈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리퍼트 대사 쾌유를 기원하는 ‘광기’가 미국에 대한 숭배주의(worshiping)에서 비롯됐다”고 보도했다 한다. 참 낯 뜨겁게 하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미국민의 시각으로 꼬집는 ‘숭배주의’라 하니, 이 무슨 망측한 상황이란 말인가. 마치 봉건시대에 그랬듯 조공국가에 머리 조아리고 봐 주십사, 읊조리는 듯한 이런 모습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결코 보여주어서도, 보아서도 아니 되는 장면이다. 

더구나 정치권의 발 빠른 대응은 100M 단거리 선수에 가깝다. 대사 피습을 계기로 테러방지법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기정 사실화하려는 움직임은 아연실색케 한다. 미국의 테러방지법은 9·11 사태에 따른 미국 나름의 대응 태세였다. 그 테러방지법으로 해서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고 현재도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 이래 중동에서 호된 값을 치루고 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함의를 지닌 사안이다. 그런데도 국민적 쟁론마저 생략한 채 밀어붙이려는 차제에 여당 내 보수 매파들까지 섣부른 논란을 거부하고 나설 정도이니, 그만 실소를 머금게 한다.

이런 일련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문명적 지표가 흔들리는 때문이다. 일국의 대사를 흉기로 찌른 행위는 어찌됐든 문명적 자아에서 문맹적 자아로 전이된 정신의 소유자에게서 보는 행동이라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훼절된 현대사의 유물의 발로일 수도 있겠으나 궁극에는 자국민의 이익과 자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협상하는 외교 행위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터임이 분명하다.

그런 식의 쾌유 기원 행사나 구호, 정치권의 즉답적 행태는 우리 민족이 지닌 의젓한 문명사(史)를 스스로 갉아먹는 사대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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