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연화촌 출신인 내 아버지는 1948년, 그러니까 미군정 치하일 때 경찰관이 되었다. 만 20세가 되지 않아서 큰아버지 송대진의 이름을 도용했다. 가난을 가업처럼 이어받은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서류 조작까지 하면서 경찰관이 되려고 했는지를 내게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었다.

순천, 광주, 담양, 화순, 장성 등지를 옮겨 다니며 경찰에 봉직했던 아버지는, 학력의 한계 때문에 승진할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세간을 트럭에 싣고 옮겨가야 했던 장면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버지는 계급정년에 걸려 쉰이 조금 넘은 나이에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7년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가 되었다. 대학 시절 아버지와 집안의 기대를 뿌리치고 연극에 매달렸다. 집안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나는 귀가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 일이 있어 정문을 통과해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학교 바로 앞에 우리 집이어서 아버지는 캠퍼스를 산책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를 부를 수 없었다. 또 추월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였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때 이른 실직자가 된 아버지는 어떤 새로운 일도 시도할 수 없이 가진 돈이 없었다. 5남매를 기르는 데 경찰관의 봉급은 형편없는 박봉이었다. 그 다음해 나는 연극을 포기하고 교사가 되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아 스스로 비굴하게도 느껴졌지만,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도 최근 3년간 실직자로 살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인 아들이 있었듯 나도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아들이 있다. 내 아버지는 5남매를 키웠지만 나는 딱 아들 하나뿐이라는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경관이 되어 여순사건, 한국전쟁, 4・19, 5・16, 유신독재, 10・26까지 온갖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나는 대학 1학년 때 5・18을 눈으로 지켜봐야 했고, 1987년 6월 항쟁, 1988년 전교조 결성투쟁 등의 격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나의 경험은 실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자취방, 하숙방을 전전하며 이사 다니느라 힘겨워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코트의 속주머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작은 아파트 하나 사거라”. 아버지를 배웅한 뒤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1000만 원 수표가 들어 있었다. 내가 저축해 놓은 돈과 합쳐 24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는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었던 거리를 일순 없애버리고, 그런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속 좁은 짓인가 하는 것을 단 한 번의 언행으로 보여준다. 내게 아버지는 감정의 조절을 매우 잘하는 배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한 단 한 번도 연습을 통과하지 않은 내면의 연기를 표출할 줄 아는 배우였다.

어느덧 나도 50대 중반이 되었다. 2014년도 다 저물어갈 무렵 나는 속으로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 무렵의 아버지 생각을 한 것이다. 나도 내 아들의 아버지이므로 내 아들에게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3년간의 실직자 생활을 접고 취직을 결심했고, 운 좋게도 2015년 1월 2일부터 출근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물론 취업만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족시켜 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아들들은 우리의 청춘시절보다 더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 아니 이미 심각하게 세상은 비뚤어져 버렸다는 생각에, 그 아들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어떤 악행에 대해서도 눈감고, 그 악행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야 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 사람을 위한 순정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거의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기적을 믿는다.
유럽의 과학자들이 2004년에 발사한 혜성탐사선 로제타호는 무려 11년 동안 지구와 태양 거리의 42배가 넘는 65억Km를 비행해 2014년 11월에 탐사로봇이 67P라는 혜성에 도착했다. 진정한 기적은 절망을 딛고 일어선 노력에서 나온다. 모든 순정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결국 기적을 만들어 내리라 하는 것이 요즈음 내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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