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화개의 국사암 뒤로 불일폭포를 향해 산길을 걷는데 흰 꽃들이 통째로 떨어져 있었다. 흰 꽃잎에 노란 꽃술이 마치 삶은 달걀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함박꽃인가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이의 얘기를 들으니 그건 함박꽃이 아니고 노각나무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김해화 시인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 지리산엔 노각나무꽃이 필 거라고. 그런데 노각나무꽃은 높은 나뭇가지 끝에 피기 때문에 나무에서 피어난 꽃 모양은 보기 어렵다고. 그리고 동백꽃처럼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일명 산동백이라고도 한다고.

나는 나무들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노각나무를 좋아한다. 언젠가 비가 내리는 날 반야봉 뒤에 있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대장 박영발 비트를 탐사하고 노고단 쪽으로 내려오는데 그 노각나무가 처음 내 눈에 들어왔다. 미끈한 몸매에 타원형의 반점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아프리카의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다 벗고 맨몸으로 그 차가운 비를 다 맞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각나무는 빗물을 온몸에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눈물이 많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했다. 슬픔을 오래 머금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다 잊은 지 오래인데 뒤돌아서서 혼자 눈물을 훔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도 슬픔의 진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였을까. 나무들 사이로 푸른 하늘을 보았다. 나는 불현듯 떠나가 버린 두 벗을 떠올리고 콧물을 훌쩍였다. 오월과 유월에 나의 벗 둘이 잇달아 세상을 등졌다. 한 사람은 한국화가였고, 또 한 사람은 스님이자 민중가수였다. 한 사람은 팔월에 있을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곧 나올 음반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쉰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담으려고 해서 부담감이 너무 컸을까. 둘은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이 세상의 공기가 너무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무심함에 강렬한 스파크라도 일으키려고 하듯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숲 속의 노각나무를 떠올렸다.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으면 그 꽃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노각나무꽃은 죽은 듯 살아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게 아니고, 죽은 듯 살아있는 것이다. 삶의 일정을 일찍 접어버린 두 벗들도 죽은 듯 살아있으리라. 한 사람은 지리산 만복대 밑에서, 또 한 사람은 화순의 백아산 밑에서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영혼들을 깨워 일으키면서.

둘을 떠나보내고 나는 간단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그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영혼과의 이별 후 내게 아무런 통증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에게 너무도 무심한 벗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뒷골에 묵직한 통증이 올 때면 집을 나서 걷고 또 걸었다. 나도 노각나무처럼 남들이 잘 볼 수 없는 꽃 피울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본래의 땅으로 툭 떨어질 수 있을까. 어제는 섬진강 백운천의 박두규 시인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새로 한 시에 떠나서 하사마을의 집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강물은 출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흥겨웠다. 개들은 귀에 선 발자국 소리에 고요를 찢으며 짖어대었다.

이름을 내지 않는 생에 이끌리면서 나의 삶도, 나의 시도 달라지리라. 세상의 질서를 어긋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리저리 찢으며 온갖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실은 외로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이 세상을 좀먹는 복마전인지도 모르고 외롭지 않을 생을 약속받기 위해 윗선에 줄을 대고 ‘한 건’을 만들어 윗선의 눈에 들기 위하여 밤을 새운다. 그들의 귀에 조용히 새벽이 오는 소리, 박새와 무당새와 검은머리딱따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릴까.

내일 일어나면 일찍 밥을 해 먹고 다시 산에 가야겠다. 당치에서 농평을 지나 황장산 능선을 지나 목통마을까지 가는 길에 나의 노각나무와 만나야겠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쌍계사까지 걸어가야겠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두통도 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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