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They tried to bury us.  They didn't know we were seeds.”

어느 날 수업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칠판이 가득 찰만큼 큰 글씨로 영문으로 된 멕시코 속담을 하나 적어놓았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그날도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는데, 몇몇 아이들의 눈은 칠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 가득한 그들의 눈빛을 즐기다가 이윽고 이렇게 물었다.  

“혹시 모르는 단어가 있나요?”

“bury요.”

“그럼 seed는 알아요?”

“예. 씨앗이요.”

“오케이. 그럼 bury를 땡땡이라고 하고 한 번 해석해 보세요.”

“그들은 우리를 ‘땡땡’하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씨앗인 줄을 몰랐다.”

“여기서 ‘땡땡’이 무엇일까요?”

“매우요.”

“(한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야, 매우 아니야. 넌 고등학생이 그것도 모르냐?”

“허허. 모를 수도 있지. 발음이 비슷해서 착각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한 건 잘한 거야.”

“감사합니다. 선생님!”

“(싱긋 웃어주고, 다시 학생들에게) 씨앗을 어디에 묻지요?”

“땅에요.”

“그렇지. 씨앗은 땅에 묻지.”

“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를 묻으려고 했다. 맞죠? 쌤!”

“빙고. 근데 묻으려고 했다보다는 묻어버리려고 했다가 좀 더 실감 나겠다. 그럼 한 번 끝까지 해석해 보도록.”

“그들은 우리를 묻어버리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씨앗인 줄을 몰랐다.”

“퍼펙트! 근데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 그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땅에 묻어버렸는데 알고 보니 귀중한 것이었어요.”

“와, 그 해석도 멋지다. 또 다른 사람?”

“땅에 묻어서 없애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안 없어진 거예요.”

“와, 가까이 왔네. 근데 왜 안 없어진 거야?”

“씨앗이니까요. 씨앗이니까 다시 살아 난 거죠. 씨앗은 희망이잖아요.”

“와, 멋지다. 씨앗은 희망이다! 희망 말고 다른 말은 없을 까요? 묻어버리려고 해도 묻어지지 않는 거요.”

“자유요.”

“와, 자유 좋다. 또?”

“진실이요.”

“진실? 그렇지. 진실은 묻는다고 묻어지는 것이 아니지. 언젠가는 그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지요. 근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진실을 묻어버리려고 한 일이.”

“세월호 참사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묻어질까요?”

“아니요.”
 
“왜 묻어지지 않을까요?”

“진실은 씨앗이니까요.”
 
“씨앗은 생명이 있잖아요. 언젠가는 살아나겠죠.”

“억울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진실은 씨앗처럼 생명이 있어서 아무리 묻어버리고 해도 언젠가는 살아나지요. 세월호 참사로 인해 너무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더 억울한 것은 그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가족들의 절규와 외침을 국가가 외면한 거예요. 국가가 국민을 외면한 거지요. 왜 진실을 밝혀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를 외면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진실은 묻는다고 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꾸준히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해요. 사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냥 땅에 파묻혀 버린 진실도 많을 거예요. 그건 그 시대의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 파묻히더라고 언젠가는 씨앗처럼 되살아날 거라는 희망도 바로 사람에 대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 여러분을 보니까 정말 희망이 보이네요. 진실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 언젠가 되살아날 거라는 희망요. 여러분 오늘 정말 멋지네요.”

“선생님도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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