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규
하늘씨앗교회 목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늘씨앗교회에서는 특별한 손님을 맞았다. ‘세월호 가족’이다. 그날 설교 제목은 ‘안티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뜻인데,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예수를 찾아 기쁨으로 경배했다. 평화를 환영한 ‘크리스마스’였다.

반면에, 당시 유대를 통치한 왕은 ‘해롯’이었는데, 로마에 충성을 바친 아버지 덕으로 그는 ‘이두매’ 사람임에도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늘 유대인에게 배척을 받아 왕위를 잃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해롯은, ‘새로운 임금’, ‘평화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에 그만 제정신을 잃어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가 태어난 곳이라 전해지는 베들레헴과 그 인근지역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평화의 왕’이 오심을 경배하며 맞는 것이 ‘크리스마스’라면, 그를 대적하고 죽이는 해롯의 처사가 바로 ‘안티크리스트’의 의미, 곧 ‘평화 죽이기’이다.

‘헤롯의 학살사건’을 구약성서 ‘예레미야서’에서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학살당한 곳 베들레헴 지역은 라헬 후손의 땅이며, ‘라마’는 그곳에 있는 성읍의 이름이다. 자식을 잃은 라헬의 통곡은 ‘세월호 부모’의 통곡으로 이 땅에서 재현되었다.

진도의 팽목항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통곡하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라헬의 슬픔’이다. ‘세월호 참사’는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악하고 무능하며 불의한 ‘부패정치’가 만들어낸 학살사건, 곧 2000년 전 평화를 거부하던 해롯의 만행, ‘유아 학살’의 정확한 복사판이다. 부패한 권력에 뇌물을 주고 그들 비호 아래 불법경영을 일삼던 ‘세월호’ 경영방식은 필연적으로 사고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우연한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학살당한 것이다.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그 학살자의 망령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세월호 참사’이다. 이 학살자의 망령은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이다. 침략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일에 앞장섰던 친일파세력이 건국 초기에 이 땅에 발을 붙였다. 침략국 일본의 천황에게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여 그 노예가 되었던 자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부터, 우리는 이 괴물에게 결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압제 당하게 되었다.

학살자는 반드시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을 비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은 항상 억울하다.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우리 아이들이 바로 그 무고한, 죄 없는 사람이고, 따라서 아무 책임질 일이 없는 순박한 생명들 아닌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고, 무슨 책임이 그들에게 있단 말인가?

우리가 용기를 내지 못하여 독재 앞에 무릎을 꿇었고, 우리가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었고, 결국 우리 어른들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 객실에서 들려왔다던 방송소리가 지금도 우리 귓전에 들려온다. 우리를 겁박하는 무언의 소리가 줄기차게 들린다. “가만히 있어라! 꼼짝도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라! 국론이 분열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입을 꼭 다물고 침묵하라!”   아, 우리나라! 슬프고 괴롭고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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