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되면 모든 잎은 새로운 잎이요 모든 풀도 새로운 풀이다. 사람도 밤낮없이 늘 태어나지만 태어나는 사람마다 늘 새로운 사람이다. 주기는 다르지만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죽기 전까지 이처럼 우주자연의 순환성 속에 늘 새롭게 태어나 존재하다가 죽는다. 사실 모든 생명들은 죽기 전까지 다 새로운 존재들이다. 90세의 노인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우리의 구체적 일상이 상대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새롭게 태어나면 상대적으로 나는 헌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에 있어서 새 것과 헌 것의 개념은 본질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번 태어난 생명은 90세가 되었어도 죽을 때까지 스스로 빛나는 생명일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스스로 빛나는 존재로 살지 못하고 죽을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생명은 스스로 빛나면서 또한 스스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해와 달이 나무와 풀이 온갖 짐승과 새들이 물고기들이 그리고 당신이 나를 존재하게 하며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하려고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생명활동을 하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다른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빛나게 한다.

깊은 숲의 나무 하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다가 가지만, 그 나무는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는다. 그리고 꽃을 피워 봄이 있게 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 발견되어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회자되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고 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진리일 것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無不爲)는.

하지만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주자연의 존재적 질서와 그 존재의 순환적 질서를 철저하게 깨며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간혹 정글의 질서를 말하며 자연은 힘의 논리에 의해 진행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의 자기중심적인 논리일 뿐이다. 자연의 먹고 먹히는 삶의 실상은 자연의 순환적 질서라는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순환의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당면한 살림살이에 치여서 무위(無爲)의 진리를 구체적 진실로 자신의 곁에 두지 못한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삶의 욕구가 도를 넘어 탐욕의 세월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위(無爲)의 진리가 관념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자본문명의 길을 걷게 되면서 무한대로 팽창한 탐욕 때문이다.

이 현대인들의 탐욕은 이미 21세기의 삶 속에서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탐욕이야말로 폭력의 근원이고 모든 순환 질서를 깨는 근본 원인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당위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나’의 탐욕에는 관대하지만 우리 사회나 다른 누구의 탐욕에는 분노하면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