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소리하는 아버지 따라 다니며 흥얼거려

무성(無聲) 이재명 명창이 임방울의 ‘적벽가’를 복원하여 12월 6일(토) 오후 3시 순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완창 공연을 펼친다.

 

이번 완창 공연을 펼치기까지 그가 소리꾼으로 걸어온 길은 한편의 소설이다. 고흥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유독 아버지가 하는 소리에 끌려 흥얼거리며 다녔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 무서워서 마음대로 소리를 못하다가 익산으로 고등학교를 가면서 본격적인 소리연습이 시작됐다. 아버지 눈에서 벗어났지만 누구를 찾아가 배울 수도 없는 처지라 음악 테이프를 듣고 또 들으며 연습을 거듭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부르는 소리는 먼저 그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 자꾸 부르다보니 실력이 쌓여 20대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쑥대머리’를 불러 최우수상을 받았고 연말에 전국노래자랑 결선에서 국악부분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조관우의 아버지인 조통달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스승을 통해 배우며 몇 배로 연습을 해야 하는데 건물 안에서 하는 연습으로는 소리가 안 트였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서울 관악산에 올라 밤부터 새벽까지 연습에 매달렸다. 도무지 목소리가 안 나와 거듭 연습을 하는데 새벽 4시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각에 바스락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짐승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사람이 아닐까싶어 등골이 오싹해서 소리를 꽥 질렀다고 한다. 그러자 한 스님이 나타났다. 몇 시간 동안 소리연습을 훔쳐보던 스님은 “내가 4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서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집중해서 할 수가 있나? 우리는 수행하려고 앉아있어도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는데..” 라며 감탄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미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했다. 연습할 공간이 없어 주로 밤에 연습을 했는데 한번은 간첩으로 몰려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간첩으로 몰린 사연은 밤을 새서 목청껏 노래하면서 발이 꽁꽁 얼어 발을 녹이기 위해 불을 쬐고 있는데 자율방범대원이 새벽에 산에서 불 피우면 간첩이라고 판단하고 잡아간 것이다. 돌아보면 허허 웃음이 나는 재미있는 사연도 많은 모진 날들을 지나 실력을 인정받고 1989년에는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고흥 말봉산에 움막 짓고 소리공부 매진

어렵게 들어간 국립창극단은 대우가 좋았지만 소리에 매진 할 수 없었다. 창극을 하면 대사가 가장 중요한데 소리 연습을 하다가 목이 쉬면 대사가 안됐다. 소리를 해먹고 살려면 목청부터 해결을 봐야겠다 싶어 1991년 국립창극단을 그만두고 산속을 헤매 다니며 죽기 살기로 소리에 매달렸다. 고흥 말봉산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소리공부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어머니 시집올 때 해 온 솜이불을 둘러쓰고 차디찬 공기를 버텼다. 바람을 막아도 움막이 바깥 공기를 다 막지 못해 이불 밖은 주전자 물이 꽁꽁 얼 정도였다. 그래도 솜이불 안에서 죽지 않고 잘 버텼다.

아침에 일어나서 너무 추워 꼼짝 할 수가 없었지만 5분 정도 벌벌 떨다보면 몸에 열이 차서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맑은 정신에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그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보름에 한번 어머니가 사는 집에 쌀을 가지러 가면 “아직도 안 죽었냐?” 고 물을 정도였다. 산속에서 소리연습 3년을 작정하고 들어가 매진하는데, 2년 7개월째 되는 어느 날 산속으로 사람이 찾아왔다.

남원시립국악원에서 찾아온 것이다. “말봉산에 소리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며 남원에서 이도령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소리공부 3년을 채우지 못해 안 된다고 거절했다. 주변 사람들이 “잠깐 돈을 벌면 될 텐데...” 권유해서 이 도령 역할만 끝내고 내려오려고 수락한 것이 계속 일해 달라는 남원시립국악원에 청에 이끌려 3년 정도 일하고 나왔다.

남원에서 나온 이유는 그가 하고 싶은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편하고 안정된 삶이 좋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소리를 하며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소리를 하기 위해 가난하게 살아도 견딜 수 있었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좀 작은 집에 살고, 좀 추운 집에 불편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 임방울 선생의 소리 대중화 됐으면 좋겠다 ”

이재명 명창의 호 무성(無聲)은 송정희 선생이 지어주었다. 무성(無聲)의 없을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소리의 시작과 끝, 그것을 이루라’는 바람이 담긴 호다. 이재영 씨는 “무성(無聲)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호”라고 말하지만 그 호를 감당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눈물겹다.

1999년 벌교로 내려와 벌교국악원을 운영했고 최근에는 생목동에 무성국악진흥회를 열어 석 달에 한번 국악인들이 모여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10년 최근 보성소리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 명창은 판소리 12마당이 전승되지 않고 있어서 자신이 복원을 하겠다는 의지로 공부를 해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쑥대머리, 수궁가를 즐겨부르는 임방울 추종자였고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에 임방울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소리공부를 할수록 임방울 명창의 소리가 사라져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한다. 2007년부터 ‘임방울의 적벽가를 해봐야겠다.’ 마음먹고 7년이 지난 2014년 12월 6일에야 공연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그의 바람은 “임방울의 소리가 대중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리가 묻혀 버리다보니 판소리 하는 사람들도 임방울의 적벽가를 들으면 “그 소리는 어떤 적벽가냐?” 고 묻는다.

임방울 명창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전무후무한 소리꾼이라고 하는데 워낙 자신의 활동으로 바빠 제자를 양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명창은 임방울 선생의 몇 안 되는 음반을 닳도록 들으며 연습했다. 사람들은 이 명창의 소리가 임방울의 소리를 닮았다고 했지만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어서 절망에 빠질 때도 많았다고 한다. 산속에 들어가 추위를 이겨가며 그 소리들을 다시 찾아 변방에서나마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는 이 명창의 이번 시도는 눈여겨봄직하다. 복원판소리는 세상에 나와 있는 소리가 아니어서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해 부르기 때문에 훨씬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인데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요새 사람들은 골고루 보고 싶어 하지 2시간 30분 동안 혼자서 완창 하는 것을 즐겨듣지 않는다. 적벽가는 전통적으로 충의(忠義)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에 의해 전쟁에 동원되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민중들의 한과 이에 대한 항의와 풍자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남창 위주인 〈적벽가〉는 현대 판소리의 여성화 추세로 인해 전승 탈락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러한 때 이재명 명창의 적벽가 완창 공연 소식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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