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밤 두 시가 되면 자주 잠에서 깬다. 오래 전에 심하게 앓은 디스크 영향 때문이다. 잠을 자기 전에 한 시간 가량 스트레칭을 해도 자는 사이에 몸이 굳는다. 거실로 나가 삼십분 가량 달밤에 체조를 하고 나면 몸은 다시 회복이 되지만 마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거나 불행하거나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냥 잠자리에 들기에는 혼자만의 텅 빈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팝송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emptiness(텅 빔, 공허함)이란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 나는 마치 내 과거를 들여다보듯 그 단어를 들여다보곤 한다. 아이들에게 단어의 뜻을 이런 식으로 설명해준 적도 있다.
‘옆에 칼이 있으면 몸에 집어넣고 빨리 생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마음의 상태임.’
그 극한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신앙도 시도 아니었다. 그저 성실한 생활이었다. 내가 조금씩 내게 주어진 삶에 성실해지면서, 특히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성실해지면서 그 끔찍했던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3.
그래서 나는 진실이란 말보다 성실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지금에 와서 그렇다는 말이다. 성실이란 말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 한 순간의 날카로운 진실이 내 체질에 맞다. 나는 체질적으로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성실한 성품을 아내에게서 배웠다. 아내는 내 체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몰론 나도 아내에게… 아내는 그저, 그리고 변함없이 성실한 사람이다. 과장된 포즈와 자신을 미화하지 못해 안달인 나도 조금씩 아내를 닮아가면서 어떤 한 순간의 광휘나 도취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이 덤덤한 삶이 때로는 지겨워 가끔씩은 일탈(아내로부터의 자유?)을 꿈꾸기도 하지만.
4.
‘두 시의 유혹’이란 제목을 단 것은 잠을 자야하는데 이 혼자만의 시간에 뭔가를 읽거나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뜻에서다. 스트레칭을 이십분만 하고 두 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가야겠다. 내 구세주들을 만나러.
5.
색채를 잃고 밑그림으로 남아 있는 겨울산에 와서
도취 없이 생을 사는 법을 배운다
잎 다 떨구고 비로소 숲이 되어 서 있는 나무들
잎 진 자리마다 무한 허공이 달려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홀로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렇듯, 제 잎을 지워 멀리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리
- 졸시, ‘깊어진다는 것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