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목요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전교조를 포함한 순천시민단체가 함께 주관하는 집회다. 매주 목요일마다 스무 명 가량 모여서 한 시간 정도 사람들 왕래가 잦은 도로변 길가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다가 온다. 가로수가 은행나무들인데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가을이 되면 나는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수모를 당하는 주된 이유가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기 때문이라고 해도 교실만 나오면 나는 행복해진다. 가을이니까, 교실 밖이 온통.......가을이니까. 하여, 촛불을 들고 한 시간 동안 길가에 서 있는 동안 내가 거의 초 단위로 저항해야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다. 나도 모르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로 눈이 가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먼 허공으로 돌려버리곤 한다. “나야, 지금이 그럴 때냐?”
 

2.
밤 두 시가 되면 자주 잠에서 깬다. 오래 전에 심하게 앓은 디스크 영향 때문이다. 잠을 자기 전에 한 시간 가량 스트레칭을 해도 자는 사이에 몸이 굳는다. 거실로 나가 삼십분 가량 달밤에 체조를 하고 나면 몸은 다시 회복이 되지만 마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거나 불행하거나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냥 잠자리에 들기에는 혼자만의 텅 빈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팝송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emptiness(텅 빔, 공허함)이란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 나는 마치 내 과거를 들여다보듯 그 단어를 들여다보곤 한다. 아이들에게 단어의 뜻을 이런 식으로 설명해준 적도 있다.

‘옆에 칼이 있으면 몸에 집어넣고 빨리 생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마음의 상태임.’
그 극한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신앙도 시도 아니었다. 그저 성실한 생활이었다. 내가 조금씩 내게 주어진 삶에 성실해지면서, 특히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성실해지면서 그 끔찍했던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3.
그래서 나는 진실이란 말보다 성실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지금에 와서 그렇다는 말이다. 성실이란 말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 한 순간의 날카로운 진실이 내 체질에 맞다. 나는 체질적으로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성실한 성품을 아내에게서 배웠다. 아내는 내 체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몰론 나도 아내에게… 아내는 그저, 그리고 변함없이 성실한 사람이다. 과장된 포즈와 자신을 미화하지 못해 안달인 나도 조금씩 아내를 닮아가면서 어떤 한 순간의 광휘나 도취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이 덤덤한 삶이 때로는 지겨워 가끔씩은 일탈(아내로부터의 자유?)을 꿈꾸기도 하지만.
 

4.
‘두 시의 유혹’이란 제목을 단 것은 잠을 자야하는데 이 혼자만의 시간에 뭔가를 읽거나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뜻에서다. 스트레칭을 이십분만 하고 두 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가야겠다. 내 구세주들을 만나러.  
 

5.
색채를 잃고 밑그림으로 남아 있는 겨울산에 와서
도취 없이 생을 사는 법을 배운다
잎 다 떨구고 비로소 숲이 되어 서 있는 나무들
잎 진 자리마다 무한 허공이 달려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홀로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렇듯, 제 잎을 지워 멀리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리

- 졸시, ‘깊어진다는 것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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