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최명주
여천고등학교 교사
가을이 깊어간다. 자꾸만 하늘에 눈길이 간다. 높푸른 가을 하늘에 눈길을 주고 있노라면, 고은 시인의 <가을 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그래, 이 가을에 나는 누구에게 편지를 할 것인가? 그러다가 손편지를 좀처럼 쓰지 않는 아이들에게 억지로라도 손편지를 써 보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이내 접는다. 그것이 평가라면 억지로 쓸 것이고, 평가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건성으로 하는 인사처럼 겉치레가 되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피식, 웃는다. 어쩌면 가을의 우수(憂愁)는 나만의 상념인지도 모를 일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 작물의 생장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땡볕에 무성하게 자라다가 가을에 수확한다. 부실한 과일들은 다 떨어질 것이고, 착실한 과실들은 말 그래도 착실(着實)이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나는 이 가을에 무엇을 수확했을까? 이즈음이면 학교는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기말고사 하나만 남겨 두고 있다. 기말고사만 무사히 치러서 넘기면 한 해가 가는 것일까? 아이들이 이 과정에서 배움과 성장의 의미를 얼마나 키워왔는지 돌아볼 새 없이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수치화된 성적, 평가 결과에 모든 것을 귀결시켜 버리는 것이 우리네 학교의 풍경이다.


평가와 성찰 사이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봄에 틔운 싹들에서 만들어낸 결실을 거둘 것이고, 여름내 우거진 무성한 잎들을 떨구어 내야 한다. 그렇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일까? 무릇 성찰(省察)이 사람됨의 근본이라면, 그것은 무성하게 자라나는 시기보다는 모든 것을 비워내고, 떨구어 내는 시기여야 하리라. 자성(自省)의 과정에는 평가가 포함된다. 그것이 스스로의 평가이든 남들이 하는 평가이든 간에. 우리 교육은 ‘평가의 과잉’이라 할 만큼 평가가 교육을 규정하거나 구속한다. 말 그대로 본말전도(本末顚倒)이다. 어디 학생들에 대한 평가뿐이겠는가. 학교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교원의 전문성을 신장시킨다는 교원평가는 막대한 행정력을 낭비하며 그야말로 요식행위로 형해화(形骸化)된 채 진행된다. 그 속을 잠시라도 들여다보면 개탄이 절로 나온다. 애시당초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일은 그렇게 귀결되는 것인가?

학생들에 대한 평가 역시 수업과정의 일부로서 이른바 다음 수업과정의 환류(피드백, feedback)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등급 매기기와 규정짓기로 작동한다. 이런 연유로 우리 교육은 ‘가르치기’보다 ‘골라내기’, ‘걸러내기’, ‘갈라치기’라는 쓴소리가 일리 있게 들린다. 농작물로 말하자면 그 작물의 특성이 모두 다를진대, 그 특성과 성장의 조건을 무시한 채 결과물을 줄을 세워 재는 일에 바쁘다. 교육이 사회적 선발(selection)과 배치(allocation)의 기능을 수반하는 것이기는 해도, 그 본질은 학생들의 지적·인격적 성장과 배움을 돕는 일이라 할 때,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듯 우리 교육의 현주소와 교육활동의 의미를 되돌아볼 일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의 말처럼 가을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날들일지 모른다. 아니, 그래서 성숙의 시간들을 갖는 것이리라 믿는다. 더 추워지기 전에 봄부터 자라난 내 몸 안의 이파리들을 모두 내리면서 이 시 한 편을 사색하는 것으로 이 가을을 보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여긴다. 작고한 지 꼭 20년이 된 그가 몹시 그립다.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 가을에 이런 이에게 편지 한 번 써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 김남주, <사랑1> 전문 -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