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자/수필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소설가께서 “예전에는 현실에 독을 타야 소설이 됐지만, 지금은 현실에 물을 타야 소설이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낯이 뜨거워 맨정신으로는 사실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현실이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고 끔찍하다. 갈수록 독서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생각될 때가 있다.

지난 달, 개인적인 볼일로 신흥사 템플스테이에서 3박4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템플스테이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없고 시설이라고는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가 전부였다. 사나흘 세상소식과는 담을 쌓은 채 먹고 자고 차 마시는 일로 지내다가, 집에 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다. 지하철을 오랜만에 타보는 나는 옆자리 손님에게 고속버스 방향이 맞는지 길을 물었다. 어르신은 대답 대신 큰 목소리로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거요. 글쎄. 거기가 어디라고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나 이런 한심한 인간 같으니. 그것도 대통령……” 손에는 서너 장의 신문쪽지를 들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열변을 쏟아내고 있었다. 길을 묻는 초면의 사람에게 “글쎄, 이럴 수가…”를 연발하며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난리라도 터졌나? 대통령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혹시 지진해일이라도 난 걸까? 아니면 대형 화재? 머릿속으로 온갖 나쁜 일들이 상상되었다. 내용이 몹시 궁금해진 나는 가판대에서 얼른 신문 한 장을 샀다. 가판대의 신문들은 한 가지 사진과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고속버스에서 틀어주는 텔레비전에서도 온통 한 가지 사건만 되풀이 전하고 있었다.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첫 번째 해외순방에서 대통령의 대변인이 성추문을 일으켰다는 기사였다. 아니,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이게 사실이라면 난리는 난리다. 과연 지진해일에 버금가는 초중량급 난리다. 대통령의 대변인이 뭣 하는 사람인가? 대통령의 할 말을 대신 말해주는 대통령의 입이다. 대통령의 대변인은 나라의 입이고 국민의 입이다. 나라를 대표해서 중요한 외교에 나선 사람이 고작 성추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으니 나라의 수치요 대통령의 수치며 국민의 수치다.

노발대발 흥분하던 어르신의 모습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외신에서 떠들고,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대통령은 사과까지 할 판이니 국가 수치 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겠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스러움이었다. 끝까지 변명을 둘러대는 태도는 한심하고 측은하기까지 했다. 인턴으로 뽑혀 열심히 일했던 상대여인은 얼마나 놀라고 배신감이 컸을까. 이런 파렴치한을 남편이나 아버지로 믿고 살아온 가족들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 것인가. 한 사람의 옳지 못한 행동이 수많은 피해자를 낳게 되니 안타깝고 딱하다.

지위의 높고 낮음, 학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요즘 성추행이 늘고 있다. 전문가의 진단으로는 성추행에 관대한 사회분위기와 성교육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한다. 법적인 처벌이 미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또 일부에서는 재수가 없어 걸렸을 뿐이라는 무책임한 발언도 나온다. 어떤 경우이든 피해자는 힘없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누구에겐 순간의 실수가 피해 여성에게는 평생의 멍에가 되기도 한다. 평생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여성이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해야 행복한 사회가 된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성범죄 추방에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불과 한 달 전에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성추행 사건이 세인들의 관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 유야무야 묻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여성 1천 명이 연대하여 대통령의 전대변인을 고발했다고 한다. 성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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