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산에서 길을 잃다

▲ 최명주
여천고등학교 교사
며칠 전 가까운 동네 야산에 혼자 올랐다. 낮은 정상까지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갈림길에서 길을 알아 둘까 하고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가 분명한 산길이었는데도 여름 장마철에 수북하게 자란 나무와 풀, 가시덤불들에 길이 막혀 있었다. 되돌아서지 않고, 풀섶을 헤치며 길을 찾아 나섰으나, 오히려 더 막막해지는 상황이었다. 참, 동네 창피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네 뒷산에서의 조난이라니. 어찌어찌 겨우 낮은 산길을 헤치고 나왔으나, 누구에게 이야기하기에도 참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큰 산에서만 조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잘한 삶의 행로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삶의 길이란 어쩌면, 내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해 있거나,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길이 나의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그 길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한다. 길은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할”(신경림, <길>) 지도 모르며, “어느 사람의 노정이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당치 않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최인훈, <광장>)는 지적도 새겨볼 만하다.
 

길 찾기, 삶의 영원한 화두

길.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고 말이다.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이고 기본적 의미이다. 지상으로도 지하로도, 수중으로도 복잡한 길이 생기고 난 지금의 현실에서는 뭔가 좀 아쉬운(?) 정의일 수도 있다. 몇 줄 더 나아가면 이런 정의도 실려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역사적 발전 따위가 전개되는 과정’ 혹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해 가는 데에 지향하는 방향, 지침, 목적이나 전문분야’가 바로 그것이다. 길이라는 말이 폭넓게 쓰이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길 찾기. 적어도 이 말은 이런 뜻을 내포한다. 길은 이미 있어야 하고, 그 행로도 정해져 있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찾아 나선 이의 의지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미로 찾기 게임도 아닌데, 무슨 길 찾기? 지금까지 지나온 길 말고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것인지? 길을 잃어 버렸다는 것인지? 흔히 인생에 비유되곤 하는 길에 관한 은유에서 ‘길 찾기’는 매우 중요한 삶의 주제임이 틀림없다.


길은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

몇 해 전, 마흔 세 살의 늦은 나이에 내 전공도 아닌 교육사회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선 나에게 면접하던 교수님은 의아하게 물었다. 흔히 하는 질문, 왜 왔냐는 것이다. 난 ‘길 찾기’를 모티프로 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삶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겠다는 다소 거창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난 그 교수님의 답을 2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을 수 있었다.

“길을 찾으셨나요? 못 찾으셨다면 큰 도움이 못돼서 죄송합니다. 다만, 그 길이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길을 찾는다는 것은…”

이쯤해서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사상가인 루쉰(魯迅)의 말을 빌려 마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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