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규/시인, 순천대 문창과 강사
날이 갈수록 기상이변이 일상화하고 있다. 그저 자연재해로만 치부하기엔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현대문명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미리 예측한 과학자가 있었다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별로 없었다.
남아시아와 일본의 지진해일 등 수십만 명이 희생되는 대참사 뉴스 가운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한 소식이 있었다. “산토끼 한 마리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뉴스였지만 스리랑카의 야생동물국 관계자는 “동물들은 저마다 육감을 갖고 있어 재앙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알았으며, 높은 곳으로 대피한 것 같다”고 전했다.

사실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들의 육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목받아 왔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화산 폭발 때에도 생피에르 시민은 3만 명이나 죽었지만 동물 사체는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동물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피신했던 것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틀 전에는 심해어가 해안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징조가 있었다. 이처럼 동물들의 뛰어난 육감으로 인한 기이한 행동, 그 징조를 먼저 읽었다면 대참사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동물의 육감을 익히 알고 활용해왔다. 청개구리가 울거나 개미 떼들이 줄지어 가면 곧 비가 온다든지, 출항 준비 중인 배에서 쥐들이 내리면 머지않아 폭풍우가 온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식이었다. 그리하여 예감 혹은 예지력이 뛰어난 시인들을 ‘잠수함의 토끼’라 부르지 않았던가.

지리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섬진강변 용두리에 살던 1998년 7월31일 오후였다. 이 마을에는 20대 중반의 바보총각이 살고 있었다. 요즘 말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우였다. 그런 그가 너무나 맑았던 그날 오후 내내 동네 솔밭에 올라가 산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뒷집 할머니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쟤가 왜 저러지. 날도 좋은데 비가 오려나” 중얼거리며 빨래와 고추를 걷어 툇마루로 들였다.

그런데 채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상특보가 발효되기도 전에 지리산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순식간에 8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뒷집 할머니에 따르면 그가 이처럼 심하게 울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이 마을과 지리산의 기상예보관이었다.

그의 예감 혹은 육감은 정확했으되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따금 그가 청개구리처럼 울면 빨래를 걷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천치(天痴)는 하늘이 내린 어리석음, 하늘이 내린 병이 아닌가.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하늘과의 교감이 가능한 사람이 바로 천치라는 얘기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육감이란 무엇인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넘어서는 제6의 감각(the six sense)이 아닌가. 부연하자면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나 오감 이전의 직감을 말한다. 빈번해지는 대참사를 목도하면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제일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육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의 교감, 생태적인 삶으로서의 육감은 그 얼마나 소중한가.

진정한 농부나 어부들은 달무리나 바람을 보고 날씨를 미리 예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파괴는 재앙을 부르는 인간 교만의 극치이지만, 하늘을 읽고 바다와 바람을 읽어내는 자연과의 교감은 현대인들이 되찾아야 할 고향이자 오래된 미래다. 자연인으로서 인간 최대의 행복은 언제나 탐진치(貪瞋痴)의 오감을 넘고 넘어 마침내 육감을 타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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