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초는 ‘민중’ 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 이다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중략)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박성룡, <풀잎2>


▲ 문수현
순천고 교사
이 시를 나지막이 읊조리다 보면 정말 내 입에서 풀잎 색깔의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향기로운 풀잎 향기가 풀풀 풍기는 것 같았다.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의 <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런 과정을 지나며 ‘풀’ 하면 자동적으로 ‘민중’이나 ‘민초’를 떠올리게 되었다.(이런 해석은 <풀>을 오독한 것이라는 오성호 교수의 매력적인 평문이 있다.) 여리고 약하지만 온갖 수탈과 짓밟힘에도 다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되살아나는 이 땅의 백성들과 풀은 닮았다.

풀은 정말 지독한 놈이다. 말끔하게 풀을 매고 왔지만, 일주일 뒤에 가 보면 어느새 풀들이 아우성을 치며 올라와 있다. 예초하고 2~3주가 지나면 풀을 언제 벴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떨 땐, 풀을 매고 조금 있다 뒤를 돌아보면 금방 풀이 다시 돋아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큰 풀만 뽑고 왔으면서 안 매고 온 작은 풀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풀은 결코 민초처럼 여리지 않다. 풀을 매본 사람은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영악한지 안다. 어지간히 자란 풀은 손으로 잡아당겨도 잘 뽑히지 않는다. 잎만 툭 끊어진다. 질기다! 뿌리째 뽑힌 것 같았던 풀이 잔뿌리 몇 가닥을 슬쩍 땅에 남겨 두고 미래를 예비한다. 영악하다! 농작물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잡초를 뽑으면 작물이 함께 딸려 나오기도 한다. 비열하다! 보호색은 물론, 보호모양을 갖춰 풀인지 작물인지 헷갈리게 하는 놈들도 있다. 두 손 두 발 들지 않을 수 없다. 농부 김계수가 “인간과 잡초가 공생하는 것만이 불가피하면서도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고 조언하여 마음을 다잡긴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제초제의 유혹’을 느낀 적이 있다.

2년 동안 주말에 작은 텃밭과 감 농사를 지으면서 ‘풀’이 ‘민중’이라는 기존의 내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민중은 힘이 없고 약하다. 민초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에 무방비 상태로 당한다. 밟으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가엾고 불쌍한 존재가 민초다. 민초는, 혹 잘리지 않을까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간과 쓸개를 빼놓고 산다. 가끔 대들 때도 있지만, 을(乙)은 갑(甲)의 횡포에 잡초처럼 끈질기거나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한다. 나는 민초를 ‘풀’보다 ‘작물’에 비유하는 게 맞다고 본다. 권력과 금력의 잡초로부터 작물을 보호하지 않으면 민초 작물은 녹아버리거나, 위축되거나, 열매가 잘아진다.

풀은 기득권 세력이다. 김명수와 정성근을 보라. 아니 대통령과 여당 핵심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뇌까린다. 밟아도 끈질기게 대든다. 여론이 안 좋으면 살짝 엎드린 척하다가 금세 고개를 쳐든다. 세월호 참사로 국민이 뭇매를 놓자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척하더니, 안대희에 이어 문창극을 들이민다. 국회의원, 수구 언론, 검사, 판사 들이 음으로 양으로 거든다. 우리는 재판정에 선 재벌들의 뻔뻔한 변명을 신물 나게 들었다. 기득권 세력의 잡초적(?) 행태를 떠올리는 일은 우리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일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갑은 을을 아주 질리게 한다. 수시로 말을 뒤집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권력자나 부자들은 잡초처럼 영악하고 비열하다. 민중은 그들처럼 끈질기고 강인하지 못하다. 나는 기득권자의 잡초적 근성이 민중보다 훨씬 윗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풀’이나 ‘잡초’를 ‘민중’, ‘민초’로 풀이한 기존의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풀을 보거나 잡초라는 말을 들으면 민중 대신 ‘기득권 세력’을 떠올릴 것이다. ‘풀=기득권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어 보자.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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