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올해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33주기를 맞는다. 춘궁기 나무들은 저마다 흰 꽃을 피우며 소복을 입는다. 위에 기재한 ‘오월의 노래1’은 광주민중항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노래로 ‘그날이 오면’ ‘사계’ 등으로 유명한 문승현 씨가 1981년에 만들었다. 그 누구도 감히 5월을 입에 담지 못했던 서슬 퍼런 군사정권 초기에 노래로 ‘그날’을 형상화하고 추모했으며, 노래였기에 더 오래 남는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고 괴로움이었던 시대 진실은, 양심은 살아있노라고 숨죽여 노래한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쓰러진 너의 붉은 넋 /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으로 시작되는 ‘오월의 노래2’는 80-9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면 아마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이 노래는 프랑스의 노래 ‘어느 할머니의 죽음’에서 선율을 따와 가사를 붙이고 작자미상인 채 구전가요처럼 시위현장에서 뜨겁게 불러졌다. 직설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선율의 극명한 대비는 비장미와 긴장감을 한껏 높이며, 느리게 시작해 점차 빠르게 ‘피 피 피’의 함성으로 끝맺으며 결사를 도모한다. 반면 ‘오월의 노래1’은 정적이며 회화적인 가사와 애잔한 선율로 인해 5월 그날을 그림으로 치환시키며 시간은 정지한다.

80년 5월. 터무니없이 어리고 호기심 많고 무모했던 나는 날마다 가까운 시청앞 군중 속에 섞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던 하루 무작정 시위버스에 올라탔고 버스의 목적지인 도청에서 내렸다. 도청 앞은 이미 수많은 인파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나누어준 김밥을 손에 들고 잠시 서성거렸다.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는 길가의 은행나무는 화염방사기 탓인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도로 곳곳에 골목골목마다 질질 끌려있는 검붉은 핏자국... 봄볕은 따가웠고 자꾸만 땀이 났다.

집으로 가고 싶었으나 이미 노선버스는 없다. 시내를 걸어가는 내내 몸 이곳저곳이 가렵다. 이때부터였다. 역사가 어떻게 개인과 관계 맺고, 개인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인지, 끊임없는 화두가 되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둘러싸고 이를 아예 없애려는 보훈처와 기념재단과의 마찰이 일고 있다. 82년 고윤상원열사와 박기순열사의 영혼결혼식에 삽입되었던 이 노래는 80년대 이후 민주화과정에서 가장 널리 불러졌던 현장의 목소리이다. 노래는 한 사회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이것을 말살하려는 작태는 여전히 80년 광주가 계속되고 있다는 반증에 지나지 않는다.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고. 오월의 노래는 한낱 노래를 넘어 생동하는 역사이자 기록이다.

이재심
지오바이올린 원장
철학과 음악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바이올린과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가르친다. 음악을 향유하고 사유하는 이 행위가 무디어진 일상에 잔잔한 즐거움이자 위로가 되기를 꿈꾸며 글을 쓴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