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팽목항
▲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사고를 접한 4월 16일에는 ‘아니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지’하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사고가 제대로 관리되기 위해 꼭 필요한 ‘매뉴얼’을 생각했다. 훈련된 선원이나 해경이 몸으로 익히고 있어야 할 메뉴얼, ‘해난사고 대응요령’대로 하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공포에 떨고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진도아리랑의 후렴구처럼 아리고 쓰린 날들이다. 이리 아리고 쓰린 이유는 먼저,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진면목을 보았고 그 속에 내가 속해있어서, 나 자신 또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성인도 아니고, 지시하면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 학생들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지나자 슬픔은 ‘구조를 마음먹고 내팽개친’ 해경과 정부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며칠간 답답했다. 새벽에 일어났다. 이미 다 찼다는 자원봉사 자리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진도로 향했다.
 

진도실내체육관
5월 4일. 있어야 할 사람들보다 지원물품과 지원단체 천막이 많다. 실종자 가족들이 많이 빠졌다. 시신과 함께 안산으로 올라갔단다. 남아있는 60여 가족들은 체육관의 높은 천장과 텅 빈 스탠드로 둘러싸인 마룻바닥 가운데에 놓여있다. 바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무인도처럼 하나 둘 셋 앉거나 누워있다. 말소리 조근조근 걸음도 자근자근,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무거운 기운 속에 무겁게 움직인다. 이 무거움을 깨는 유일한 소란은 연단 위에 놓인 대형 스크린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다. 거침없는 전파의 무차별성은 여기도 예외일 수 없다. 까랑까랑한 표준어의 예의 바른 목소리가 뜬금없이 싫다.

여기 말고 진도에는 다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국립남도국악원이다. 이곳이 천막 수준이라면 거기는 호텔급이다. 숙박시설과 연습실 등을 사용하면 가족들을 수용할 수 있고 국악원측에서도 승낙하였지만,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공무원들과 KBS 기자들이라고 한다. 이런 도통 이해 불가한 사소한 일이 쌓이고 쌓여 가족들은 분노한다. 아이를 잃어버리고 난방이나 환기도 안 되는 마룻바닥에서 지내야 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심할지는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체육관 철제문 옆에 오늘 새벽 수습된 시신의 인상착의가 적힌 종이 여러 장이 붙어있다. 어림 적은 키와 머리카락의 길이, 상하의, 소지품과 특이사항 등이 적혀있다. 저녁 6시에 팽목항으로 들어온단다.

수습된 시신을 확인하러 가기 전과 갔다 온 후 청심원을 복용한다. 소화제처럼 쉽게. 24시간 켜진 전등 아래서의 생활이 일상이 돼버렸다. 눈만 감고 있지 자는 게 아니다. 안산의 일상은 되돌아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을 먼 과거가 되었다. 일상이 굳건해야 마음도 몸도 안정감을 얻는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은 그들의 피붙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유실 당했다. 그것도 소매치기당하듯 한순간에 송두리째.

일상이 무너지면 그 틈을 비집고 정신적 육체적 불균형, 즉 혼란이 찾아온다. 이 혼란이 지속되면 질병이 달라붙는다. 밥 한 끼 다른 곳에서 먹어도 배탈이 나고, 환절기의 찬바람 한 번에도 감기에 걸린다. 하물며 하늘에서 땅으로 꺼지듯 추락한 심적, 육체적 상태에서 질병은 필연이다. 지금은 쌓이고 쌓여 폭발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허나 일상 아닌 일상은 평온했다. 일상의 평온함은 그 내면에 깊은 분노를 감추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팽목항

 
박×× 컴백홈
노란 리본에 마음이 달려있다.
목탁소리 끊이지 않는다.
부부가 미동도 않고 바다를 바라본다.
네 명의 엄마들이 교대한다. 모두 바다를 본다.
하염없이 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또 바라본다.

아직 팽목항에 남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장순복씨 부부를 뉴스타파가 인터뷰했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시대는 멀쩡한 사람을 도인으로 만들고 있다. 시신이 인양되면 나와줘서 고맙다고 절로 합장을 하게 되고, 벌레도 함부로 밟지 못하며, 세수 한 번 안 하는 게 대수냐며 찬 물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따뜻한 물을 피하게 된다고 얘기하는 부부. 아! 이 부부는 파괴된 일상을 추스르는 게 아니라 뛰어넘는 중이구나! 다시 땅으로 내려오길. 그래서 일상의 굳건함에 발 딛기를 힘들게 기원한다.

봉사자들이 많다. 천막도 많다. 종교인들 또한 참 많다. 착한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한 듯하다. 정부의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 생긴 공간은 해방구였다. 자원봉사자들이나 단체들, 그리고 배달된 지원물품은 넘친다. 식사도 무료, 약품도 무료, 치료도 무료, 생필품도 무료로 구할 수 있다. 무료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체계적인 것이 문제다. 비체계적으로 조직화되지 않는 자원봉사에 의존하면 구호는 행사성으로 일시적이다. 국가가 담보할 구호가 시민의 봉사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난 행정의 효율성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고서 제자리만 빙빙 돌았던 해경처럼.

좌우를 둘러보니 경찰이 많다. ‘아니 무슨 경찰이 이리 많지?’ 했는데 대통령이 온단다. 관광 오듯 온단다. 조금 큰 여자들은 모두 여경이다. 반듯한 남자는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경찰이다. 제복 입은 사람은 주차관리요원이든 교통경찰이든 사복이든 모두 경찰이다. 이파리 셋과 무궁화 셋이 같이 종종걸음이다. 경찰들 사이사이 기자들이 있다. 카메라를 들고 삼각대를 들고 마이크를 들고 기다린다. 취재는 잠깐이고 대기는 오래다. 대통령 의전을 위해 그 많은 경찰은, 공무원은, 기자는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선장처럼 대통령이 자신만이 할 수 있고,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안 하고, 헛일에 마음 쓰면 또 다른 세월호는 언제나 침몰한다.

세월호의 참사와 같은 사회적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 않는다. 제주 가는데 배를 타는 사람은 강남 아닌 안산, 부자 아닌 빈자, 어른 아닌 학생들이다. 구조된 사람도 배나 구출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은 선장을 비롯하여 선원들은 100%지만, 훈련되지 않은 승객일 뿐인 학생은 약 25%에 불과하다. 더구나 구조가 의무인 해경은 학생 등 승객보다 선원을 먼저 구출했다. 친구를 살려달라 외치는 학생의 절규를 외면했다. 이것만 봐도 세월호 참사는 우연히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인 사건이다.

대통령이 가족과의 면담을 마쳤다. 그녀는 호위받으며 사라진다. 왜 내려왔을까?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란다. 위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필부의 위로도 소중하다. 대통령의 위로도 소중하나 달라야 한다. 필부의 상황적 위로는 ‘뜨거운 위로’다. 같이 안고 같이 우는 것이다. 깊은 공감의 연대는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가슴으로 품어 안지도, 함께 목 놓아 울지도 않는다.

또, 대통령이라면 이러한 위로보다 다른 차원의 구조적 위로 즉, ‘차가운 위로’이어야 한다. 모든 가족이 품고 있는 사고 발생 초기의 ‘구조 없음’ 등 여러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찌 진정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제대로 하겠다는 선언은 결코 위로가 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좌절과 분노를 안겨줄 뿐이다.

위로받지 못한 슬픔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전환된다. 이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면 끝없는 자책이 이어진다. 이러면 곧바로 생명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길은 슬픔에 대한 위로와 함께 분노의 해소를 위한 연대이다.

슬픔에 대한 위로는 철저한 진상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쭙잖은 말 뿐인 위로로는 유가족 등 희생자들이 전혀 위로받지 못하고 좌절감만 깊이 안겨줄 것이다. 의인은 의인으로 추앙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철저한 응징을 가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다. 이를 바탕으로 ‘뜨거운 위로’와 ‘차가운 위로’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위로는 국가에서 사회에서 이웃에서 다층적으로 또, 수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분노의 해소를 위한 연대는 또 다른 희망이다. 세월호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겪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있다. 허망함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과 분노 등이다. 이를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목표로 한 성장, 소유, 개인, 물질 등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부패와 비리를 발본색원하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편히 쉬게 하는 길이다. 이를 위한 연대만이 훗날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가 이만큼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어린 넋들을 건강하고 평안한 사회의 밑거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과 그 가족, 이웃의 염원이리라.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희생자의 넋이 이제 평안하기를 빌고, 가족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야겠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나의 슬픔과 분노를 전해야겠다. 잘 쓰지 못하는 손글씨이지만 한 자 한 자 따뜻한 마음을 담아 보아야겠다.

 
독자들께 제안한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손 글씨로 편지를 쓰자. 편지를 모아 직접 전해드리자. 함께 안고 눈물을 흘리자.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고, 헛된 죽음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우리의 슬픔과 분노가 그 분들께 전해질 때, 함께 슬프고 함께 분노함을 통해 마음이 연결될 때 우리 모두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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