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탄/신/일/기/념/특/별/기/고

“중생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붓다는 오로지 타인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이 한 구절은 약 5세기경에 세워진 인도 나란다 대학의 ‘산티데바’라는 붓다의 제자가 설한 ‘입보살행론’ 논서에 나와 있는 글귀로 짧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아주 쉽고 간결하게 표현한 글이다.

그리고 불가에 “중생이 곧 붓다요 붓다가 곧 중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중생이라도 오로지 타인의 행복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붓다라는 뜻이다. 중생이라고 하는 스스로의 생각을 전환만하면 붓다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의 다른 의미는 붓다와 중생을 나눌 필요도 없다. 단지 생각을 어떻게 일으키느냐에 따라 붓다와 중생을 나눌 뿐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은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싯다르타가 지금부터 2637년 전 인도 석가족 카필
라국의 왕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인도에는 16강대국이 있고 작은 분소국가가 많았다고 하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는 그런 시대였다. 농경지사회였으며 국가간 상업도 활발한 시대로 그러한 시대에 태어난 소년 붓다는 매년 열리는 농경제에 부왕인 정반왕을 따라 마을로 시찰을 나섰다.

아버지를 따라 마을을 돌면서 재미있고 신나는 것도 많았지만 싯다르타 눈에는 두 가지 의문이 생겼는데 “하나는 인도의 사성계급에 따라 크샤트리아인 왕족과 바라문족인 제사장들의 권세와 그들의 부유함에 비해 평민과 불가촉천민은 너무나 힘들게 보였고 처참해 보였다.

다른 하나는 밭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데 흙이 뒤집어져 땅속에 있던 벌레가 밖으로 드러나자 마침 그곳을 날던 참새가 벌레를 입에 물고 하늘을 날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매가 참새를 두발로 낚아채 가는 것이다.

소년 싯다르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찌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저렇게 먹고 먹히는 관계인가?” 자라면서 생멸현상인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점차 커지고, 훗날 왕자로써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부인과 아들이 있어 지금은 행복하지만 결국 왕자인 자신도 다른 일반사람과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출가자를 보고 자신도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고자 출가할 결심을 갖고 몰래 성밖으로 빠져나와 29세에 출가를 하여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하는 도가수행(道家修行)과 고행주의(苦行主義)라고 하는 고행수행 등을 6년간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수행으로는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길을 택하고 중도수행(中道修行)의 결과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7일 만에 깨달음을 얻으셨다.
석가족이었던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석가모니라 불려졌는데 ‘석가모니’는 범어 샤카무니(Sakyamuni)의 음역으로 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라는 뜻이다.

금번 부처님오신 날을 즈음하여 서울에서 틱낫한 스님과 함께 하는 명상 프로그램에 동참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침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동안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풀, 쑥, 제비꽃, 민들레 등 갖가지 야생초들이 이름 모를 꽃들과 서로 어우러져 자연속에 아름답고 평온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이름 모를 풀들 하나하나가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함으로써 자연을 만들어 내듯이 다종교사회인 이 사회도 서로 어우러져 그 속에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여하였는데 걷기명상을 하면서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오직 현재 걷고 있는 걸음과 호흡의 ‘알아차림’ 을 통해 나는 고향에 도착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죽고 나서 극락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요, 지금 바로 여기 호흡과 발걸음에 머무는 그 순간이 깨달음이요, 나의 본 고향에 도착한 것이다”라는 스님의 법문이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새소리와 함께 많은 소리들 속에 섞여 서로서로 부딪치지 않고 내 귓전에 들려왔다.

이처럼 나와는 다를지라도 타인의 삶과 타인의 가치관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붓다의 가르침인 ‘중생일지라도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는 붓다’처럼 서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의 자리가 예수님이 말씀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자리요, 붓다가 말씀하는 사랑(慈)과 연민(悲)의 마음자리요, 저 나란다 대학의 산티데바의 가르침인 ‘오로지 타인의 행복을 위한 삶’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금번 부처님오신 날 행사가 타인의 행복을 위한 봉축행사가 되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국가와 국가, 이웃과 이웃, 나와 타인이 그리고 종교와 종교간 비종교인과 종교인이 서로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사회가 되기를 염원하며, 화단에 수많은 이름 모를 풀들이 자유자재로 어우러져 자라듯이 소리가 서로서로 부딪침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순천 정원박람회를 찾는 모든 분들이 순천 시민들과 함께 지금 여기 이곳에서 서로 사랑하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기를 바란다.

범일 
금당절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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