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배가 기울어가고 있는데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해 놓고 먼저 탈출해 버린 선장과 선원들의 행태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데자뷰였다. 한국인들은 역사에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그러한 행태에 너무나 익숙히 학습이 돼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저지르는 불구덩이 속에 백성들을 방치한 채 평양으로 의주로 도망해 버린 선조가 그러한 행위의 선구자였다. 그는 빗속에서 울부짖으며 임금의 몽진을 막는 백성들을 도외시한 채 혼자만 살길을 찾았다. 한국전쟁 초기에 이승만은 어땠는가. 라디오 방송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떠들더니 자신만 대전으로 줄행랑쳐버렸다. 그 직후 한강철교는 파괴해버려 서울 시민은 옴짝달싹 못하고 인민군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렸다. 더 이상 자기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군에서 나온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꿈꾸면서 온갖 영화를 다 누렸다.

전두환은 어떤가? 광주시민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권좌에 올라 수천 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퇴임한 후 국가에서 추징금을 부과하자 돈 한 푼 없다고, 배째라고 하면서 수십 명의 추종자들을 달고 다니면서 황제 골프를 즐긴다. 청년 학생들의 분신 항거로 위기에 몰린 노태우는 난데없이 분신한 청년의 유서를 누군가 대신 써주었다고 몰아붙여 한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렸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의 교활함과 잔인함과 배신을 총합하여 학습한 이가 박근혜다. 

 세월호는 인천에서 제주로 오가는 여객선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승객들이 죽건 살건 나 몰라라 도망쳐 버린 선장은 임금이나 대통령이었고 침몰 상황 초기에 정확히 판단을 하고 승객들을 구조했어야 함에도 어린 여승무원 한 명 빼고는 모조리 도망쳐 버린 선원들은 역시 이 나라의 무능하기 짝이 없는 고위 관료들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으라는 말도 안 되는 선내 방송을 착실하게 믿고 죽음의 위기에 몰린 많은 학생들과 승객들은 이 땅의 선량한 백성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배우는가. 그것은 국가를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니 국가가 하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니 그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가 나가지 말라고 하면 나가야 하고,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가야 하고, 일어나라고 하면 누워야 하고, 누우라고 하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산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국군은 빨갱이를 잡는다고 일부러 인민군 복장을 하고 마을에 들어서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인민군을 환영하는 부역자라고 간주하고 총으로 쏴버렸다. 국가는 국민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국민을 비참하게만 하는 국가를 국민은 기어이 믿고 함께 가야 하는가. 아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 국가는 망해도 좋다. 아니, 망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정부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국민은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천안함 침몰부터 국정원 대선 개입,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모든 문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드러난 문제에 대해 사과하며 책임지는 자세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또 어떻게든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할 것이며 다른 정치세력에 책임을 전가하려고 손 안에서 호두알을 굴리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결국 모든 문제는 인간의 삶과 목숨의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우리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면서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쿠르드로 강제 송환되는 이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이륙하지 못하게 막은 스웨덴의 시민 정신은 우리가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주 소중한 귀감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